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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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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06-02-08 09:15 조회3,6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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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텔 부처님나라 참선법문]2002년 3월



서울에서 부산까지



축서사 무여큰스님(2002. 3)



큰스님: "편히 앉으시죠."
음... 전부 유니텔입니까?


법운님(축서사에서 공부하시는 처사님): "이쪽은 재가 '마음의 고향'사람들입니다.


"컴퓨터에서 법운님이 주동(뜨아... 이런 망발을... 주동이라니.. )이
되어 만든 모임이 또 있더라구요."


큰스님: "아... 그럼 거기는 어디에서 주로 오셨어요?


법운님: "대구, 부산..."


큰스님: "아, 그렇습니까? 이 산중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했습니다.
엊저녁에 밤샘했어요?


"네."


큰스님: "그럼 주로 참선을 합니까? 기도를 합니까?


누군가: "각각입니다."


큰스님: "각각이래요?


선(禪)을 하든, 기도를 하든 한가지는 제대로 꼭 하시기 바랍니다. 이거 했다가 저거 하고 다른 것을 하고 그러지 말고 선(禪)이면 선(禪), 기도면 기도... 요샌 그 선(禪)에도 제 3수행법이라 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법이 있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화두 참선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확실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제3 수행법이란 것도 들어보니까 수행하는 기분을 좀 느낄 수 있는 거래요. 초보단계에서는 나름대로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깊게 들어가기는 좀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디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길로 말하면, 기도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적인 기도,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 그 외에도 이런 기도 저런 기도가 많은데, 불교적인, 절에서 하는 기도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기도중에서는 서울서 대전도 못 가는 기도도 있어요. 많이 간다고 해도 서울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그런 기도도 있고요. 심지어 서울서 부산까지 간다고 하면서 서울서 평양 쪽으로 가는, 이북 쪽으로 가는 기도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저 강원도 쪽으로 가는 그런 기도도 있고.


선(禪)도 마찬가지래요. 화두 참선법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확실하고 분명한 길이래요.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한 7, 800년 전부터 고속도로처럼 분명하게 놓여진 그런 길이래요. 그러나 최근에 무슨 수행법, 수행법 하면서 대단하게 그 이야기하는 그런 수행법들이 있는데 실상을 들추어 보면 서울에서 수원가기도 좀 어려운 수행법들이 거의 태반일거래요. 그런가 하면 서울에서 이북 쪽으로, 강원도 쪽으로, 저 중국 쪽으로 가는 그런 수행법도 있고요.


어쨌든 그 서울에서 강원도 쪽으로 가든 이북으로 가든 그렇지 않으면 대전쪽으로 가든, 열차를 타거나 승용차를 타고 가거나, 여행을 하는 여행 기분은 다 느낄 수가 있는 거래요. 그래서 여행 기분을 가지고 분명히 이북으로 가면서도 부산 쪽으로 간다고, 내가 가는 길이 제일 확실하다, 제일 바르다, 제일 잘 간다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어요. 수행은 아주 오묘해요. 그래서 그 오묘한 수행을 나름대로 초보단계에서는 느끼기만 하면 그것이 제대로 가는 것인양 느끼기가 쉬워요. 심지어 강원도 쪽이나 이북 쪽으로 가면서도 부산 쪽으로 가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길이 제일이다, 확실하다, 분명하다 이런 말 하는데, 최근에 수행법 중에서 거의 대부분이 부산은 꿈도 못 꾸고 대전까지 가면 다행스러운 그런 것이 거의 전부래요.


그런가 하면 서울을 벗어나기 어려운, 수행이라기보다는 그저 운동에 좀 가까운 그런 수행법도 있고요. 어쨌든 수행은 어떤 수행법으로 수행을 하느냐, 아주 중요해요. 많은 분이 나름대로 가지만 잘못된 수행은 차라리 안가는 것만 못해요. 후에 수행할 때 본격적으로 제대로 할려면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수행은 제대로 해야 돼요. 그래서 잘 모르거든 남들이 가는 길로 가면 무난해. 새 길로 가면 잘 못 갈 수도 있어요. 고속도로처럼 분명하게 놓여진 길로 가면 무난해요. 그래서 요새는 여러 가지 수행법을 많이 하는데, 그것도, 건강 차원에서도 , 심신수련이다 하면서 건강차원에서도 하는데, 어쨌든 건강을 위한다는 건 좋은데, 바르게, 제대로 위해야 훗날 참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수행은 잘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안 가기만 못하다, 안한 것만 못하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몇 년 전에 로마 교황이 동양의 사제들이 동양적인 수행을 한다 해서 아주 대노(大怒)했다는 그런 기사를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동양적인 수행이라면 바로 참선을 말합니다. 서양에도 참선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다는 거래요. 그래서 많이 보급이 되고 선사들이 많이 건너가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스님들 중에서도 좀 유명한 스님들이 가서 서양사람들하고 직접 상대를 해서 지도하는 그런 분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성당이나 교회를 사가지고 절로 꾸며서 포교하는 그런 분도 있고... 어쨌든 수행에 대해서 요새는 세계적으로 관심이 많다는 거래요. 그런가 하면 미래학자들도 불교적인 수행법으로 인간이 다스려지고 앞으로 살아가야 된다, 그래야 확실하고 좀 분명한, 참으로 인류를 위해서 미래지향적인 그런 그 마음닦음이 될 것이다 해서 관심을 많이 갖는다고 해요. 어쨌든 수행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래요. 누구나 해야 되고 반드시 해야 되고 꼭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애기를 낳으면 바로 문자를 가르치는데, 사실은 문자보다는 마음닦는 것을 가르쳐야 돼요. 공부라면, 책을 보는 것도 공부라고 할 수 있지만, 공부중의
공부는 바로 참선하는 거래요, 마음 닦는 거래요. 왜 그러냐,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 내용 이상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책에서 얻는 지혜는 반딧불에 비유해요. 마음 닦아서 얻는 지혜는 태양에 비유합니다. 태양과 반딧불은 비교가 안 돼요. 그 정도 차이가 있다는 거래요. 그래서 아무리 세속에서 천재성을 가졌다 해도 부처님에 비하면 속된 표현으로, 족탈불급(足脫不及, 발 벗고 뛰어도 못 따라간다)이라는 거래요. 비교가 안 돼요. 그래서 날고 기는 사람도 네가 아무리 까불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이런 말을 하는 데 그만큼 비교가 안 된다는, 왜 그러냐, 이 진리의 세계에서 체험한 분은, 그 진리의 세계가 아주 엄청나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어요. 책으로, 문자로는 아무리 보존할래야 보존할 수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그런 성이 바로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 진리의 세계에 접근 안 하면 뭘 이루어도 별 것 아니고, 뭘 갖추었다고 해도 대단치 않고, 예를 들어서 학문을 하는 분도 그냥 문자에, 문자를 벗어나지 않는 그런 정도면 그 분은 별 것 아니래요. 문자를 벗어나서 진리의 세계에 바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논문을 써도 제대로 논문다운, 참으로 불후의 논문을 쓸 수가 있고요, 그림을 그려도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야 명작중의 명작을 그릴 수가 있어요, 글을 써도 그렇고요. 그 세계를 표현 못하면 별것 아닌 대단찮은 그런 정도로 이야기 합니다. 삶 자체도 그래요, 삶 자체도. 돈을 아무리 많이 모으고 명예가 대단하고 권세가 참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그럴 정도가 되고요, 인간적인 면모를 세속적으로 아무리 좋게 평해도 진리의 세계에 접근 못하는 사람은 반쪽 인생도 못 된다 그래 보시면 돼요, 반쪽 인생이. 그냥 흉내내다가 사는 정도로 그렇게 이야기 해요.


경전을 자상하게 읽어보면 부처님은 아주 대단해요, 보통 사람이 사실은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래요. 누가 무엇을 물어도 아주 적당한 이야기를 바로 해드려요. 어린 애가 묻는 이야기나 대학교수가 묻는 이야기나. 종교인이든 막노동인이든 어떤 분이 무슨 이야기를 물어도 아주 적당한 이야기를 대답해드려요. 그런가 하면 그 분의 말씀이나 행(行)이나 여러 가지 그 인품같은 걸 보면 아주 대단해요. 참 따라가기가 좀 어려운 분이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보통 사람은 그 분의 냄새도 못 맡아요, 사실은. 그런가 하면 그림자 보기도 어려워요. 실물은 보기는 어려워요. 실물은 보기는커녕 그림자 보기도 어려워요. 그렇게 대단한 분이라는 거래요. 즉 진리를 체험한 분이기 때문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그, 진리를 얼마나 접근하느냐, 인생을 접근했느냐 못했느냐,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사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접근했느냐, 얼마나 체험했느냐, 그것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조금도 과한 표현이
아니래요.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즉,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 거기를 얼마나 체험해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느냐 못 느꼈느냐, 그것을 가지고 경중(輕重)을 사실은 따질 수가 있어요. 그런 것이 바로 그 진리의 세계인데, 그 진리의 세계를 접근할라면 참선이나 기도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개중에서 지금까지는 화두 참선이 가장 확실한, 가장 분명한 그런 방법이다 할 수가 있어요. 위빠싸나
같은 그런 방법도 있긴 있는데 고런 방법은 깊게는 들어가기는 좀 어려워요.초보단계는 쉽게 경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빨려 들어가는 그런 분도 있는데, 어쨌든 그런 진리를 가장 제대로 잘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화두 선(話頭禪)이래요. 그래서 화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고 늘 해야 되는 것이 화두 참선이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화두 선(話頭禪)을, 옛날 부처님 말씀에는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사람 몸 태어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이런 이야기하면 선뜻 이해가 좀 안될지 모르지만, 세상에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세상의 흙 같다면 사람의 수는 손톱 위에 올라갈 수 있는 흙 정도다 이렇게 비유해 놨어요. 세상의 모든 땅 덩어리, 이 지구 덩어리 전체 흙에 비해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숫자는 손톱 위에 올라갈 수 있는 흙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래요. 그 생명체, 땅속에 있는 거나 바다속에 있는 거, 날아다니는 거, 다, 뭐 기어 다니는 거 따지면, 사람은 뭐 몇 십 억 하지만 그건 아주 적은 숫자라는 거래요. 그래서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아주 어렵지만 사람으로 태어나도 불법(佛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불교 신도가 몇 백만 하지만, 세계적으로 따지면 천만 이상이 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참 몇 억이 되겠지만, 그 숫자도 아주 적은 숫자라는 거래요, 다른 여러 생명체까지 다 합치고 보면. 그래서 불교를 만나기 어렵다, 불법(佛法)을 만나도 정법(正法)을 만나기 어렵다, 불법(佛法)을 만나도 다 바른 길로 가는 것 같지만 개중에는 엉뚱한 길, 잘 못 가는 분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정법(正法)을 만났다고 해도 화두 참선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그래서 경전에는, 비유해서 맹구우목(盲龜遇木)이다, 그런 비유를 해 놨어요. 저 태평양 바다보다도 아주 넓고 넓은 바다가 있는데, 그 바다 한가운데 아주 깊은 곳에 눈 먼 거북이가 한 마리 살고 있는 거래요. 그 거북이는 천년마다 한번씩 물위에 올라와 숨을 실컷 쉬고, 내려가면 또 천년간 물위로 안올라와도 된다는 거래요. 물위에 올라와서 숨을 쉴 때는 판자를 의지해야 된다는 거래요. 그 판자가 어떤 판자냐, 거북이의 머리를 넣을 수 있는 구멍 뚫린 판자라. 태평양 바다보다도 넓고 넓은 그런 바다 한가운데 그 눈이 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그런 판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어요. 그건 사실은 불가능하거든. 그렇게 만나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그런데 화두 선(話頭禪)을 만났더라도 그렇게 어려운 만나기 어려운 화두 선(話頭禪)을 만났다고 하더래도 화두 선(話頭禪)을 제대로 하는 분은 극히 희소해요, 극히 희소해. 우리 스님들 중에서도 참선하고 화두 선(話頭禪) 잘 한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개중에는 사실은 잘 못하는 분도 있어요, 잘 못하는. 즉 서울에서 부산 갈려고 하면서 평양 쪽으로 가면서도 부산 쪽으로 가는 걸로 알고 있는 분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강원도 쪽으로 가면서 부산 쪽이라고, 자기 가는 쪽이 제일 좋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뭐 스님들 뿐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래요. 세속인들은 뭐 더 심하지.


그래서 하면서도 참으로 제대로 바르게 못하는 그런 분도 많아요. 되도록, 바르게 해도 안되는 분도 있고요. 그래서 되는 분은 희유하다 할 정도로 어렵고, 어떻게 보면 좀 어려운 그런 공부지만, 또 기도를 잘, 제대로 하면 또 의외로 바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 이 공부래요. 어쨌든 이 공부는 제대로 해야 되고 바르게 해야 돼요. 그래서 공부에서, 공부에서 자기 인생을 펼쳐야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즉 수행의 바탕에서 돈도 벌고 명예나 권세도 떨치고요, 그런가 하면 행복을 찾아야 된다는 거래요. 그래야 참으로 바른 삶이라는 거래요.


부처님 말씀에 중생을 변소 안에 있는 구더기에 비유한 그런 말씀이 있어요. 변소안에, 옛날에 변소에는 구더기가 아주 많았어요. 그 구더기들은 변소 밖을 생각을 못해요. 그 안에서 평생 거기서 태어났다가 오물, 사람의 오물만 먹고는 결국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마는 놈들이래요. 그 구더기가, 부자 구더기는 변을 얼마나 확보했느냐, 변 많은 놈들이 부자라(웃음), 사람이 보면 세상에 못난 놈들이래요. 그래서 저 놈들 참 못났다... 못날 정도가 아니지... 그러면 부처님이 보면 사람도 그 비슷하게 보인다는 거래요. 우리가 구더기를 못났다고 하지만 부처님이 볼 때는 범부도 그만큼 어리석은 거래요. 그래서 부처님같은 분은 대자 대비심을 안낼 수가 없는 거래요. 어린애, 어머니나 할머니가, 막 애를 낳았을 때 애 우는 거나 똥싸고 뭐 하는 것을 보면 저 놈이 언제 커서 사람 노릇 할까 싶지요. 그것처럼 아주 어린 애처럼 보이고 변이나 막 싸고 막 옷, 깨끗하게 입혀 놓으면, 나갔다 들어오면 시커멓게 때 묻혀 들어오는 그런 애들하고 같은 거래요.


그래서 그런 애가 참 답답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저 놈 언제 클까 싶은 생각을 내는 것이 어른들인데, 부처님이 볼 때는 중생들이 그렇게 보이는 거래요.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대비심을 내지 않을 수 없는 거래요. 그건 왜냐, 진리를 너무 모르는 거래요. 즉 참으로 진실한 그런 바탕에서 사는 삶이 아니고 그야말로 구더기처럼 사는 삶인기라.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 것은, 부처님 눈에는 구더기가 변 많이 모을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이 보이는 거래요. 그 놈들이 찍찍 소리가 사람들의 무슨 고성방가처럼 들리는 거라. 어쨌든 즉 허망하고 아주 볼품없고 별 것 아닌 그런 것으로 비춰지고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거래요. 그래서 이제 불쌍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다고 하는데, 어쨌든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즉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란,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고... 여법(如法)하게 살고, 인간으로서 가장 원만하게 갖추어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중생이 잘 살고 제대로 살고, 갖추어 살 수 있는 확실한 길이 뭐냐,
진리를 바탕으로 사는 삶이라는 거래요. 그것을 바로 찾는 길이 참선의 길입니다. 거기에서 행복이나 거기서 명예나 어떤 권세나 그 무엇도 찾지 못하면 부처님 말씀에는, 달밤에 체조하는 격이라는 거래요. 그래서 눈을 바로 떠라, 비춰라, 그래서 바른 삶을 살아라 그런 말을 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얼마나 접근하느냐, 얼마나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느냐 거기에서 인생이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 어떤 그런 성과를 거두었느냐 못 거두었느냐, 그렇게 판별을 합니다.


그래서 공자같은 분도, 아는 말씀이지,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아침에 진리에 접근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공자님은 듣는다고 했는데, 사실은 도(道)는 보는 거래요. 아침에 도만 보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거래요. 공자같은 그 아주 일생, 정말 존경스러운, 성스러운 일생입니다. 그런 그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아주 존경스럽고 성스럽고 한 그런 일생이고 그런 모습이지만, 그 자체도 별것 아닌 기래요. 어쨌든 아침에 도(道)만 보만 보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가 그 바로 도(道)래요. 그걸 진리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그것을 법(法)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가지 표현을 해요. 경전에도, 이 경전에는 이렇게, 저 경전에는 저렇게, 아주 여러 가지로 표현해 놨어요. 왜냐, 한마디로 똑 떨어지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표현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장면마다, 사람마다, 환경마다, 좀 적당히 다른 표현을 써 놨어요.


그렇게 오묘한 것이 그것이래요. 어쨌든 세속에서도 머리가 좀 밝은 사람들,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길로 바로 향합니다. 그 길로 향하지 않으면 잘 못사는 삶이니까. 어쨌든 기도나 참선으로서 가장 가깝게 확실하게 갈 수있는 것이 이 길인데, 그 두 가지 중에 한가지는 늘 하세요, 늘. 아침 저녁으로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항시 관심을 가지고 늘 하는 습(習)을 들여요. 그래서 뿌리가 제대로 내리도록. 장시간하고, 하루 종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늘 관심을 가지면, 즉 염원을 하면 머리에 깊숙하게 박혀요.


그러면 그렇게 애를 안 써도 또 좀 짧은 시간을 해도 효과가 크게 나요. 하루 종일 전혀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공부를 할려고 하면 아주 생소해요. 화두까지도 생각이 잘 안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 해서는 안돼요. 설사 제대로 못하더래도 늘 관심을 갖는 거래요.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계기 때 열심히 하면 의외로 쉽게 되고 바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공부는 어떤 마음을 갖느냐, 어떤 생각을 갖느냐, 어떤 자세로 하느냐가 아주 중요해요. 생각과 자세가 갖추어지면 의외로 바로 들어가요. 그런가 하면 갖추어지지 못하면 몇 십 년 해도, 평생했다고 해도 화두 한번 제대로 못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공부는, 마음 공부는 어떤 생각을 갖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여러분이 세속에 살면서 직장도 원만하게 그렇게 다니시고 또 가정도 무난하게 꾸려 가면서 이 공부가 좀 제대로 된다면 그 삶도 금상첨화가 될 수 있을 거래요. 직장이나 가정이 아주 중요하지, 그러나 직장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거는 사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돈벌이하는 거래요. 돈벌이는 사실은 기본입니다. 돈 좀 있으면 직장 갈 필요가 없잖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 사실 직장에 할 수 없이 나가는데, 그래서 그 자체가 대단찮다는 거래요.


물론 직업으로서 아주 대단한 그런 성과로서도 뭐 참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은, 직업이란 개념 자체가 그렇지요. 가정도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고 참 위일 수 있는 그런 가정이지만, 자상하게 스스로 들어가보고 느껴보면 그것도 대단치 않고 때로는 별것 아니다, 그래서 로라처럼(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 훌훌 털어버리고 가고 싶은 그런 생각을 낼 수도 있고. 어떤 분처럼 '결혼을 해라 후회할 것이다, 하지 말아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그런 말도 뇌까릴 수 있는 거래요. 즉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대단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래요, 한마디로.


그런데 그런 그 생각에 도(道)의 체험을 하면, 체험까지는 제대로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느껴 보면서 그래 살면 그 자체가 별것 아닌 가정이래도 별것 아닌 직장이래도, 직장 자체가 바로 부처님과 같은 진리를 고대로 말하고 있어요. 즉 직장이, 돈벌이하는 직장이지만, 부처님과 같애요. 때로는 보기 싫고 괴로워하고 서로 흥얼거리던 그분이 바로 부처님과 꼭 같이 보일 수도 있고요. 즉 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게 보이고 잘 보이고,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거래요.


그래서 남다른 그런 사람을 보고 체험을 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은 깊은 공부를 하면, 남들이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몇 배를 체험하고 느낀다는 거래요. 그래서 같은 한평생이라도 몇 십년, 심지어 뭐 몇 백년을 더 사는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인생을 보다 충실하고 유익하게 사는 길이 바로 그 길이래요. 그 길은 아무리 강조해도 좀 부족한 것이 이 공부니까, 어쨌든 공부를 잘 하셔서 공부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고 공부에서 진정한 그런 행복을 느껴서 남보다 더 잘 살고 더 훌륭하고 더 보람있는 그런 인생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혹 뭐 물을 거 있거든 물으십시오.



무추재: "평상심이란 게 뭡니까?"


큰스님: "평상심이란, 이제 보통의 마음이란 뜻인데, 평시에 있는,
즉 어떤 굴곡이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 조용한 고런 마음이란 뜻인데, 그 뜻은 좀 깊은 뜻이 있어요. 즉 일체 번뇌망상이 다 사라진 아주 고요한 적적(寂寂)한 고런 상태의 마음이 평상심이다, 그래 보시면 됩니다."


정 우: "어리석은 생각인데요, 위빠싸나 같은 경우는 공부하는 맛을 빨리 느낄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면, 공부하는 법을 바꾸기가 쉬운건 아니겠지만, 가령 처음 시작할 때는 위빠싸나로 시작해서 공부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그 때부터 화두 참선법으로 바꾸게 되면 공부하는 맛을 좀 느끼니까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큰스님: "그래, 인제 고래 할 수도 있어요. 고런 것도 한 방법은 방법인데,
수행법은, 위빠싸나도 흉내내듯이 그래하면 안되잖아요, 아주 정성을 들이고 제대로 간절하게 해야 그 위빠싸나가 드디어 되는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자연적으로 뿌리가 내릴만큼 내리는 거라. 그래서 그 뿌리를 캐듯이 위빠싸나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화두 참선하기는 어려워요. 화두 참선한다고 해봤자, 하다가보면 어느 사이에 위빠싸나를 하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화두에 대한 아무 재미도 못 느끼고.


그래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듯이, 헤매다가보면 몇 시간이 지나고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인제 공부하기가 좀 어려워지는데, 위빠싸나에 재미를 느끼다 보면 화두 참선하고는, 화두 참선은 해도 별로 재미가 없어요, 무슨 일이든지 공부는 뭐 더더구나 그렇고 좀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전혀 재미를 못 느끼는 거라. 그래서 한번 물들이면 그 물을 훌훌 다 씻어버리고 새 물을 들이기가 어렵다는 거래요."


처사님: "아까 큰스님께서 부산을 갈려고 하다가 평양을 갈 수도 있고 강원도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정법을 바르게 공부해야 되고 선지식에게 지도를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선지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여쭙고 어떻게 지도를 받아야 되는지요?"


큰스님: "그건 인제 저, 처사님이 누구한테 지도를 받을려면 화두 받는 거부터, 간택하는 거부터, 간택을 해서 지시하는 대로, 지도하는 대로 공부하시면 가장 좋은 지도법이래요. 수행에는 '나'가 없어야 돼. 내 생각대로 한다든가 내 나름대로 한다든가 자기 주장대로 한다든가, 그러면 공부하기가 좀 어려워요. 망아지처럼 공부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하면 공부하기가 어렵고, 어쨌든 가장 가라면 가고 앉으면 앉고 서라면 설 정도로 시키는 고대로 곧이 곧대로 애써서 나가면 무난하고 아주 그 원만할 거래요. 어쨌든 기초부터 출발부터 받을 수 있으면 좋고요, 혹 출발부터 받기가 좀 어려우면 과정에서도 받아야되고요.


어쨌든 내 임의로 하지 말고 지도를 받아가면서 고래 하는 것이 원만합니다. 거듭하는 얘기지만, 이 공부는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공부가 아니래요. 그냥, 잘 모르는 분은 '뭐,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안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해서 체험을 한 상태에서 사는 것하고 전혀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는 것 하고는 가히 천양지차(天壤之差)래요. 그래서 같은 인생을 살지만, 아주 대단하게 사는 분이 있는 가하면, 아주 보잘 것 없이 부끄럽게 사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무추재: "지난번에 큰스님께서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라는 화두를 주셨는데요, 의심하는 법에 대해서 다시한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화두의 핵심은 의심을 짓는 거래요, 의심을 일으키는 거래요.
그래서 의심없는 화두는 화두가 아니래요. 화두 자체는 좋은 법문이지만,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면 화두 구실을 못해요. 화두는 오직 의심을
일으키는 데 본 뜻이 있어요. 그래서 의심이 크면 클수록 공부가 잘 되고, 크게 깨칩니다. 그래서 의심을 크게 일으키게 되는데,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 그 경우는, 처음에는 '염불하는'까지 붙이고, 전제라고 하는데,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 두번째는 그냥 '이뭣고'만 해요. 세번째쯤도 '이뭣고'만 하고. 의심이 나다가,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하면 의심이 나거든요, 그러면 의심이 약해지거든 바로 또 의심을 일으켜요. 의심이 이렇게 일자로 가는 경우가 있고, 일자로 가다가 뚝 떨어지듯이 의심이 약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고런 경우는 바로 일으키고, 의심이 첨에는 강하게 가다가 계속 내려가는 고런 경우가 있어요. 고런 경우는 좀 약해진다 싶거든 바로 브레이크를 걸듯이 바로 또 의심을 일으켜요. 어쨌든 그 의심이 한순간도 내게서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돼요. 늘 의심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의심기가 떠나질 않애야 돼. 흔히 그것을, 닭이 알을 품듯이 해라, 알을 품는 닭이 훈훈한 뜨뜻함이 없어지지 않도록 늘 알을 품고 있어야 삼칠일이 되면 드디어 그 병아리가 태어나듯이, 늘 훈훈한 훈기가 있도록 하듯이, 화두기가 늘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돼. 즉 의심이 늘 없어지질 않애야 돼요. 그래야 참으로 그것이 훗날 진의가 돌발해서 큰 위력이 일어나는데, 어쨌든 그렇게 늘 화두기가 없어지지 않게 하되, 간절하게 해요, 간절하게. 할 때는 오직 고것뿐이라. 아주 지극하게, 그러면서 성심성의껏하고. 즉 화두는 늘 안없어지는 것이 좋고 , 간절하게 들어야 되고, 성심성의껏 들어야 되고.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아주 진실한, 참 큰 의심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정우: "큰스님, 두번째 어리석은 생각인데요(^^), 주변에 보면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이런 화두를 드는 분도 있더라구요, 화두의 요체가 의심을 일으키는 거면 천 칠백 공안말고도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선지식들께서 주시는 것은 거의가 천 칠백 공안중의 하나인데, 무엇이 맞는지요?"


큰스님: "봉사가 서울을 갈라면 이끄는 사람이 있어서 그저 따라가야 돼.
눈 먼 사람이 그렇게 안가면 서울 못 가요. 서울 가는 길이 뭐 많겠지. 그러나 그 길이 산길로 올라가는 길일 수도 있고, 계곡으로 가는 길도 있을 테고, 뭐 별별 길이, 아무 길이라도 가면, 어렵고 아주 괴로운 그런 길도 굳이 가다보면 가는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러나 소경일수록, 앞 못 보는 분일수록 좀 좋은 길로 모시고 가듯이 가야 돼요. 그런 길이, 즉 옛부터 많이 난 그런 그 고속도로같은 좋은 길이래요. 그런 길로 가는 거 하고 새로 그 만들어 가지고 뭐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그래 가다가는 못 가. 그래 가는 길에 비유를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난 좀 부족한 사람이다, 난 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난 좀 업이 두터운 사람이다 그런 분은 그저 따라만 가는 기 현명해.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나름대로 가는 분이 있는데, 결국은 캄캄한, 앞 못 보는 사람이 서울 가는 격이래.


무추재: "큰스님을 뵙고 화두를 받는 사람은 행운인데요, 그렇지 못하고
책같은 데서 조사어록 등을 보고 화두 한 구절이 자기 가슴에 와 닿아 그걸 짓고 있으면, 그것도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까?"


큰스님: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는데, 같은 그런 지도래도,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강의할 때 어떤 교수는 아주 쉽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그렇게 강의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수는 아주 어렵게 강의를 해요,
심지어 자기도 잘 모르는 듯한 그런 표현을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런 강의를 듣는 분하고 아주 쉽게 귀에 쏙 들어가게 그래 강의를 듣는 학생들하고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렇듯이, 좀 유능한 교수밑에 학생들이 청강을 많이 하듯이, 좀 잘 가르치는 분에게 가서 배우는 게 좋잖아요? 마찬가지지 뭐. 어쨌든 그래서 역대로 선지식이 필요하고...


어쨌든 이 공부는, 지금은 아주 초보단계에서는 화두 의심을 일으키는 그런 정도에서 이야기가 오가지만, 나중에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요. 즉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가 없는 그런 경지가 돼요. 즉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멸처(心行滅處)해서 즉 말 길이 완전히 끊겨요. 말로 글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마음작용이 완전히 없어지는 곳이래요. 즉 생각으로 어떤, 이렇다 저렇다, 좋다 나쁘다,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 하기가 어려운 그런 곳까지 들어가는 거래요. 그런 곳은 대단한 분 가르침이 없으면 제대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옛날에 화두 선(話頭禪)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대혜종고(大慧宗고)란 스님인데, 그 스님은 깨칠려고요, 깨칠려고, 2년간이나, 2년간이나, 계속 그 스승이 이제 원오극근(圓悟克勤)이란 분이 있었어요. 그 방에 매일 아침 들어가는 거래요. 어떨 때는 하루 세번 네번도 들어가는 거래요. 공부 조금 했다고 달라지면 또 가서 묻고 또 가서 묻고 또 가서 묻고... 참 귀찮을 정도로 찾아 들어갔는 거래요.

그런데 2년간이나 계속 들어가도 '아니라, 틀렸어, 더 해', 계속 그러는 거래요.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끈질기게 아주 그 대혜 스님이라면 스케일이 큰 분이래요, 아주 대단한 분이래요. 그런 분도 2년간이나
하루 몇 번씩 들어가서 묻고 묻고 묻고 또 물어서 깨친 거라. 깨침이 얼마나 대단해. 그런 그 대단한 스님도 그랬는 기라. 그래서 즉, 근데 그 스님이, 원오극근(圓悟克勤)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분을 만나니까, '깨쳤다'고 하더라는 거래요. 다른 어떤 스님을 만나니까, '아, 자네가 아주 대단한 분일세. 임제종(臨濟宗)이 자네의 두 어깨에 달렸네' 하면서 아주 극찬을 하는 거래요. 그래서 그 분이 막 기분이 좋아가지고 마구 다니다가 어떤 절에 가서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났는 거래요.


그 분이 원오 선사인데,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자기는 깨친 사람이니까, 이 스님 뭐 별것 아니겠다 싶어서 이제 시험해봤는 기라, 옳케 걸려버렸는 기라. '아니라' 대번에 부정하는 거래요. 몇 번 물어도 전혀 부정하는 거래요. 그래서 그 때는 이제 아주 기분이 안 좋아가지고 화를 벌컥 내면서 그 방을 나가는 기래요. 몇 십리 걷고, 걸으면서 가다가, 자기 공부가 미진한 것을 바로 인제 스스로 좀 느끼는 거래요. 그래서 인제 그 스님한테 들어가서 또 공부를 하면서 자그만치 어쨌든 2년간이나, 매일 가서 물었는 기래요. 그래 인제 겨우 깨쳤다는 그런 일화가 있는데, 아주 유명한 일환데, 어쨌든 그 공부는, 깨침의 단계같은 것은 너무 대단하지만 그런 단계까지는 안가도 어쨌든 바르게 지도를 받아야 된다는 거래요. 설사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훗날 다음 생, 다음 생, 다음 생 언젠가는 깨칠 수 있도록, 서울에서 서울을 못 벗어나더라도, 서울역에서 역 구내를 왔다갔다 하더래도(웃음), 부산 가는
차를 타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 부산을 간다는 거래요. 뭐 차 타고 영등포를 지나서 수원, 대전까지는 설사 못 가더래도,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한다든가, 역 주변에서 뭐 몇 년간 평생 맴돌아도 어쨌든 부산가는 차를 타야 돼요. 그렇듯이, 어쨌든 공부는 바르게 해야 된다는 거래요, 바르
게 해야 되고요. 그래서 잘 못하면 나도 속고 남도 속는 그런 결과가 되는데, 자기만 봉사면 그래도 괜찮아요, 남까지도 눈 멀게 해서는 안되는 기래요, 남까지도. 그냥 육안으로 조금 먼 건 괜찮아요. 심안(心眼)이 멀면 그거는 참 큰 일이래요. 어쨌든 그래, 길은 좋은 길이고 반드시 가야 될 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늘 그래 관심을 가지면서, 설사 잘 안되더래도 늘 노력하고 그래 애를 쓰십시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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