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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6월 참선법문 전문-화두드는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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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7-13 16:14 조회4,91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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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늦은 밤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간은 서장을 강의했는데 오늘은 초보자를 위해서 화두 참구의 요령이라는 그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화두 참구는 항시 언제라도 앉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화두가 들려있는 분은 여여하게 아주 성성하게, 아주 적적하게 그대로 들어가면 되지만 만약에 화두에 진의(참다운 의심)가 나지 않는 분은 항시 원칙적인 참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에 목숨을 걸어라 합니다. 화두에 자기 모든 것을 바치라는거예요. 그래서 참선자는 화두가 있으면 살아있고 화두가 없으면 죽어있는 그런 사람정도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순간도 화두를 놓치질 않아야되요. 그것도 진의가 통달해서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하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흔히 밥값을 한다. 그런 분이야 말로 참으로 사는 분이다. 그런 분이야말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대단한 분이다.  그렇게도 말을 합니다.

어쨌든 화두가 한 순간도 놓쳐지질 않아서 아주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그런 상태가 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화두가 좀 잘되는 상태가 되려고 하려면 우선은 일체 망상을 쉬세요. 일체 잡스러운 생각을 다~ 쉬워야 해요.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어떤 생각도 다 쉬어요.  즉 마음을 비워요. 마음을 놓아요. 그래서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화두를 듭니다.

그렇게 화두를 들기 전에 앉는 자세는 아주 단정하게 아주 여법하게 앉으세요. 그 단정하고 여법하게 곧 화두가 될 것처럼 그렇게 앉되,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좀 자연스럽고 아주 편하고 아주 부드럽게 앉아요. 그래서 어떤 부분에 너무 신경을 쓴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힘이 모아진다든가, 그러지도 말고요,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편안하고, 부드럽게, 조금도 신경이 쓰여지지 않게 그렇게 앉아서 화두를 듭니다.

화두는 이제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서 잘 아시죠.? 고칙(古則)이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조사관(祖師關)이라고도 말합니다. 고칙이란 옛 조사들이 만든 곧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확철대오하신 그런 분들이 만든 법칙입니다. 공안과 같다합니다. 공안이란 공부 안독을 말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관공서를 공부라고 했답니다. 공부안독이란 관공서의 안독과 같다 합니다. 안독이란 공문서를 말합니다. 공부안독이란 어떤 법령이나 어떤 규정을 말합니다. 잘했으면 상을 주고 잘못했으면 벌을 주는 엄격한 여법한 규정을 말합니다.

그것을 흔히 조사가 되는 문이라고 해서 조사관(祖師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두는 옛 어른들 즉 깨달은 조사들의 말씀이래요. 조사들의 말씀과 그 종사가 심지를 밝게 깨달은 그 이해와 인연 즉 기행과 학인(學人)을 인도하는 행위의 종류 즉 요체를 모아서 참선자의 공부 규범으로 삼게 하고 과제로 준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대단한 법문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 천하 선지식의 진수, 그 알맹이 또는 견처(見處)라고도 합니다. 견처가 드러난 대단한 법문 중에 법문입니다. 아주 짧고 요약된 간결한 그런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팔만사천법문이 다 들어있는 아주 대단한 법문이래요. 그런데 그 법문은 말로 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법문이래요. 아무리 말을 잘하고 아무리 법문을 잘해도 그것은 해석을 하고 이해를 시킬만한 그런 법문이 아니래요. 말씀 자체가 알쏭달쏭하지만 아주 심오한 그러한 말씀이래요. 그래서 화두는 타파하지 않으면, 깨치지 않으면 알기가 어려운 그런 말씀 중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해가 안되는 그런 말씀을 타파하려면 즉 언어도단 심행처멸 言語道斷 心行處滅(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해서 발견되는 밝은 도리입니다.

 어떤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법문 중에 법문이래요. 그래서 그런 법문은 타파하지 않으면 깨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런 아주 대단한 법문이래요. 그래서 그 법문을 타파하려면, 깨치려면 어떻게 하느냐? 바로 의정을 일으켜야합니다. “화두를 공부한다”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 참선한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바로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이래요. 의정을 크게 일으키면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면 깨칠 수가 없는 것이 화두입니다. 생각으로 즉 분별심으로 사량심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고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에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염불하는 것이 뭐꼬? 염불하는 그것이 뭐냐? 어째서 무(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마 삼근이라고 했을까? 하면서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의정을 잘 일으킬 수 있는 요령은 뭐냐? 어떻게 하면 의정을 잘 일으킬 수 있냐? 첫째는 화두는 간절하게 하라고 하는 겁니다. 아주 간절하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하게 들어라하는 겁니다. 즉 화두참구의 요령은 한마디로는 요약하면 간절 절자 한마디래요 즉 간절하게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옛 선사는 화두 참구는 간절절자 하나면 족하다 했어요. 여러 말이 필요치 않다는 거래요. 오직 오직 간절하게만 하라는 거래요. 화두는 오직 간절하게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옛 참선자는 늘 간절 절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간절하게 든다는 것은 뭐냐? 그것은 절실하게 아주 성심성의껏 들어라 하는 겁니다. 절실하다는 것이란 안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꼭 해야될 것처럼, 매우 긴요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절실함이래요.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아주 지극하게 의심을 지어가는 것이 바로 절실함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비유하면 “며칠 밥 굶은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해라” 합니다. 앉아도 밥생각, 서도 밥생각, 가나오나 행주좌와, 어느 때라도 늘 밥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늘 밥 생각 뿐이래요. 그렇게 밥 생각하듯이 늘 그렇게 화두를 챙기라고 하는 거래요. 사막 같은데 가다가 물이 떨어졌다고 합시다.

사막은 물이 생명입니다. 물이 떨어지면 곧 죽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물이 마시고 싶겠어요. 목이 타면 별 수단과 방법을 다 강구한다는 거래요.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오직 물, 오직 오직 물 생각하듯이 화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 팔십된 노파가 있다고 합시다. 마침 아들을 늦게 하나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군대를 갔어요. 요즘같이 평화스러울 때가 아니라 전쟁이 한참 벌어졌을 때 갔어요. 그러면 얼마나 아들이 생각 나겠어요. 혹시 죽지나 않았을까? 혹시 사고나 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하루종일 아들 생각일 뿐일 거래요. 문만 삐걱 소리만 나도 누구냐? 하고 묻고, 차만 그냥 지나가도 오늘은 오지 않는가 보다 하면서 오직 오직 아들, 아들 생각을 할 겁니다.

그렇게 노파가 군에 나간 아들 생각하듯이, 그야말로 일구월심 오직 하나뿐인 피붙이 생각 하듯이 화두를 생각하라는 거래요. 사실 이렇게 화두를 들면 안될 일이 없어요. 이렇게 못드니까 안된다 못든다 하고 별 이야기 다 하지만 어쨌든 노파에게는 오직 아들 뿐이래요. 그 아들 전사 통지서라도 받으면 그 노파마저도 쓰러질거래요. 그렇게 오직 절실하게 생각하라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화두가 절실하냐? 절실한 이유가 뭐냐 ?뭐 때문에 그렇게 화두 화두 하는 것인가? 화두는 깨달음을 여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무상정등정각)입니다. 위없는 바로 아주 고른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확철대오입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진리를 알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보통 그냥 산다든가 예사롭게 산다는가 그렇게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일회용입니다. 연극에는 리허설이 있지만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습니다. 오직 일회용 뿐입니다. 내세는 분명히 있습니다. 일회용 뿐인 이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저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 것인가?

 여러분은 참으로 대단한 생각을 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특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특별한 생각을 해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거래요. 옛날의 어떤 선사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사흘을 춤을 추었다는 거래요. 얼마나 좋아서 사흘이나 춤을 추었겠어요.

그렇게 사흘이나 춤을 출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합니다. 확철대오의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두 번째는 보통 “안락을 얻는다” 즉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락이라고도 합니다. 아주 편하고 아주 편한 아주 즐거운 상태, 말로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을 느끼는 이것을 진정한 행복이라면 행복이다 하고 합니다.  그래서 간혹 이야기합니다만 화두에서 행복을 못 느끼면 ‘반쪽 인생도 못된다’ 또는 ‘반의 반쪽 인생도 못된다’ 라고 표현합니다.

어쨌든 화두에서 행복을 느껴야 참 행복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아주 맑고 밝고 안락하고 무애자재하여 거리낌이 없는 해탈심에서 느낀다고 합니다.

셋째는 생사문제까지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생사문제 즉 인생 대사는 뭐니뭐니 해도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일이래요. 그보다 더 큰 일이 없어요. “인생대사를 참으로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바로 화두뿐이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히 노인들에게 새벽이나 아침에 인사를 드릴 때 밤새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드립니다. 밤새 안녕하시냐? 하는 말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밤 사이에 죽지 않고 안녕하시냐? 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밤새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거래요.

그런데 노인 뿐이 아니라 젊은이도 밤새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육신입니다. 우리 신도 한분의 남편이 십여년전 쯤 돌아가셨는데 나이 삼십대 초반에 직장에서 오전 근무를 잘하고 친구들하고 식사를 하고 좀 시간이 남더라는 거예요. 시간이 나서 이발소에 가서 간단히 이발을 하고 들어갈 테니 동료들은 그냥 들어가라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발관에 갔다가 의자에 누운 채로 누워서 그대로 갔다는거예요. 이발관에서도 가는 줄 몰랐다는 거예요. 시간이 되어서 안들어가시냐?고 물으니까 그냥 늘어지더라는거예요.

학생 아이들 또는 출근하는 분들이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갔다가 불과 몇시간 만에 시체가 되어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범부의 인생이라는 거래요. 즉 천하장사 영웅호걸이라고 하더라도 숨 한번 들이켰다가 내쉬지 못하면 끝입니다. 그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보살님들은 거울을 잘 보시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예사롭게 보지 마세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 모습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사람은 이 순간도 변하고 있어요 다른 표현을 한다면 죽음으로 향하고 있어요. 얼굴은 잔 주름이 점점 늘어나고요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가고 있습니다 허리는 활처럼 굽어가고 있고 기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는 해를 누가 막을 수 있어요. 가는 세월을 누가 붙들 수 있겠어요. 참으로 무상한 것이 몸뚱아리라는 거예요.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라는 거예요.

 그냥 보통 사람은 예사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주 절실하게 느끼는 거래요. 그래서 옛날에 어떤 도인스님은 해만 지면 두 다리를 뻗고 엉엉 울었다는 거래요. 그런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절박감, 그런 간절함, 그런 지극함, 그런 것이 화두를 참으로 간절하게 하는 거래요. 우주와 인생과 자신을 제대로 확실하게 분명하게 볼 줄 알아야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바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 즉 “생사문제를 참으로 해결하려면 (화두)공부 뿐이다” 하는 그런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發心)입니다. 발심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께서는 “마음 깨닫는 데에는 발심보다 우선 하는 것이 없다” 했습니다. 발심만 참으로 잘 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 안 되는 것을 한탄 말고 발심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라” 했습니다.

흔히 “화두가 안된다, 안된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입버릇처럼 합니다. 그 안되는 이유는 발심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 공부를 해 마쳐서 “생사문제까지도 근본적으로 초탈하겠다” “해탈하겠다” 그런 대단한 마음을 못내기 때문이라는거예요. 그래서 세월이 가고, 해가 차고, 나이를 먹어도 미적지근한 생각을 하면서 결국 쓰러져야 “아이쿠!”하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그래서 옛어른께서는 “발심해라” “발심하지 못하면 이 공부 못한다” 그런 말씀을 누누이 아주 고구정녕하게 무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부는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어서 생사까지도 초탈하는 이 일이 가장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사실 이 이상보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크다” “밥이 더 크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중요하겠어요. 어떤 일도 죽음에는 비유가 안돼요.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이 일 뿐이다” 하는 그런 마음을 확실하게 아주 분명하게 가지라는 거예요 “이 일 만은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흔히 화두하기 어렵다 참선하기 어렵다 그런 말을 하는데 발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발심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요. 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오직 그것 뿐인거래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안되는 지혜도 바로 생기고요, 그렇게 괴로운 몸도 괴롭다는 생각을 아예 할 수도 없어요. 진정한 발심자라면  “어찌 깨치지 못할까를 걱정할 것인가?” “어찌 생사문제도 두려워 하겠는가?” 했습니다.

이 공부는 진정으로 발심을 해야 화두가 간절해져요. 화두가 간절해지면 그렇게 안되는 화두도요 이내 몰고 일어나요. 그런 마음을 못내는 어리석고 둔한 자신을 늘 나무라세요. 그러면서 화두를 할 때는 항시 초심으로 돌아가요. 아주 원칙적인 공부를 하세요. 화두에는 조금도 사가 없어야돼요.

그래서 한번 한번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애쓰면 이외로 쉬울 수밖에 없고 안 될 수가 없는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화두가 간절해지면 남들이 볼 때는 바보 같고 숙맥 같아요 그러나 자신은 하늘이라도 꿰뚫을 듯이 엄청난 대단한 자신감과 기상이 솟구칩니다. 그것은 느껴보지 못하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입니다. 이렇게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어가면 일단 참 진심 즉 의단이 됩니다. 그 간절한 마음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뼈마디 뼈마디에 삼백육십마디에 막 사무쳐요. 전신 골수에 오직 한마음 즉 화두 뿐입니다.

의단이 독로해서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고, 놓으려고 해도 놓을 수가 없고, 항상 소소영영하고 늘 현전합니다. 그렇게 참으로 간절하면 걸음걸음가 일념(一念)입니다. 생각생각에 오직 화두뿐이 됩니다. 그런 화두는 일념이 곧 만념입니다. 만념이 곧 일념이래요. 그래야 참으로 제대로 한다 합니다. 참으로 참구한다 그런 말을 쓰기도 합니다.

화두가 참으로 간절할 때는 시시로 견처가 변할 때가 있어요. 또 어떨 때는 걸음걸음에 견처가 변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되는 그런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화두가 간절하게 들리게 되면 선악의 망상을 떠나게 됩니다. 좋다, 나쁘다, 밉다, 곱다, 뭐 이런 저런 생각의 망상이 다 떠나게 돼요. 해태와 방일이 있을 수 없어요. 오직 화두예요. 화두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 수가 없어요. 무기(無記)에도 떨어지지도 않고요. 화두 없이 조용하게 앉아있는 것을 무기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고 마(魔)가 들어올 틈이 없어요.

그런 정도가 되면 어떤 마나 장애도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분별심도 나지 않아서 외도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분별심, 저런 사량심,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절대 외도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하면 어찌 공부에 못할 것인가?”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상응이 돼요. 시간문제래요. 옛 어른은 말했습니다. “어찌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인가? 상아탑같은 공부의 경계에 이르지 못할까?” “어찌 생사를 초탈하지 못할까 걱정하리요” 했습니다. 그런 근심할 것이 없어요.

몽중일여 꿈 속에서도 일여한 상태가 되면 생사문제까지도 자신감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면 더욱 큰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연세가 높더라도 늘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그런 분이라도 이런 정도가 되면 자신만만하고 큰 소리가 척척 나오고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어쨌든 참선자는 화두로 생명을 삼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화두가 있으면 살아있고 화두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공부를 하루에 다 해마칠듯이 해야 합니다. 공부는 느슨하게 해도 안되고 너무 좀 각박해도 때로는 문제점이 있을 때가 있기도 하지마는 공부는 이렇게 간절할 때 하루에 다 마칠 듯이 밀어부쳐야 합니다. 흔히 ‘용맹정진한다’ 하는데  이럴  때가 참으로 용맹정진할 때입니다. 자는 시간 없이 하는 것을 요즈음에는 용맹정진이라고 하는데 그런 용맹정진도 용맹정진이지만 진정한 용맹정진은 화두가 잘 되어서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을 때 그럴 때 오직 화두 뿐이듯이 밀어붙이는 그런 정진을 용맹정진이라고 합니다.

화두에 간절함이 있으면 활구(活句) 참구가 됩니다. 활구 참구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서 아주 성성하고 적적하게 되는 화두 참구를 말합니다. 화두가 간절하지 못하면 사구(死句) 참구가 됩니다. 사구 참구란 이런 저런 번뇌 망상, 분별심을 붙이면서 하는 참구를 사구 참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구 참구로 떨어집니다.

화두가 간절하지 못하면 화두참구가 아니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화두의 간절함을 모르면 공부인도 아닙니다. 간절하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래요. 그 간절함을 체험하지 못하면 공부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늘 간절함이 떠나질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공부인이다’ ‘진정한 참선자다’ ‘화두꾼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성심성의껏 하세요. 옛 성인의 말씀에 화두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이상이 없다 하신 분들도 있어요. 열심히만 하라는 거래요. 그 열심히도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니라 최선을 다하듯이 오직 그것뿐이듯이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는 공부여야 합니다. 그것이 화두공부에서는 ‘열심이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능력이상으로 애쓰는데 큰 뜻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해라’, ‘지극한 마음으로 하라’ 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하면 능히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을 것이라 했습니다. 도를 구하고 닦는 데는 지극한 정성, 지극한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출요경에 보면 “비록 백년동안 살아도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하루동안 부지런히 마음 굳센 것만 못하다” 했습니다. 유교경에는 “한방울의 물방울이라도 계속 떨어지면 돌을 뚫을 수 있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말씀 다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말씀이래요. 이 공부야 말로 아주 부지런히, 그리고 또 부지런히 해야돼요. 그런가하면 아주 정성이 있어야 돼요.

게으름 피우고 쉽게 하고 얕게 하고 틈만 나면 가서 눕고 싶고 그렇지 않으면 망상이나 피우고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그런 빈틈이 있어서는 절대 되는 공부가 아니래요. 타이트 해야돼요. 오직 그것 뿐이듯이 할 때는 그렇게 하면 이외로 쉽습니다.

세상의 일도 얼마나 열성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마음공부는 마음이 문젭니다. ‘그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얼마나 열성이 있느냐?’에 따라서 공부가 아주 잘되기도 하고 아주 어렵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화두가 안된다, 안된다’ 하고 참선하는 분들이 입버릇처럼 말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 중에 화두가 될 만큼 하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아요. 화두체험이 전혀 없는 분들이 요즈음은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화두는 참으로 될 만큼 해라!” 하는 말씀들을 옛 어른들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화두는 밥을 짓고 쇠를 녹이는데 비유합니다. 일전에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솥에 밥을 잘 앉히고 불을 넣는데, 불을 충분히 넣질 않는 거예요. 불기운이 겨우 솥에 닿을락 말락 때다가는 이내 불을 꺼내 버려요. 솥에 밥을 잘 하려면 불을 충분히 넣는 거래요. 그러면 쌀이 부글부글 잘 끓어서 아주 고슬고슬한 맛이 좋은 밥이 되는거래요. 그렇데 불을 제대로 넣질 않고 솥을 나무라고 밥을 나무래요. 그래서 이층삼층 밥이 되고 죽이 되는 겁니다.

쇠를 녹이려면 용광로에 넣으면 될 텐데 어떤 분은 숯불로 녹이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숯불로는 아무리 쇠를 녹이려고 해도 녹지 않습니다. 용광로에 넣고 얼마간만 열을 푹 올려놓으면 쇠는 그냥 녹아버려요. 이 공부는 밥하는 분이 불을 충분히 넣듯이 그래서 부글부글 끓여서 아주 맛 좋은 밥이 되듯이 그 쇠를 용광로에 넣어서 쇠가 완전히 녹듯이 녹혀야 됩니다. 즉 그렇게 할 때는 좀 충분히 하고 확실하게 하고 분명하게 하라는 거래요. 그래야 제대로 되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 말씀이 오직 부지런히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 비극가운데 비극은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게으름만 부리다가 죽어서 악도에 떨어져 사람 몸을 잃는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는 다행히 여러 전생 전생을 잘 살아온 선근이 있어서 사람 몸을 받았지만 내생에 사람 몸 받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래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해가 안되는 분이 혹 계실지 몰라요. 부처님말씀을 액면 그대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윤회설도 과거에는 그냥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특정한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요즈음은 첨단 과학으로 한 70%-80% 정도로 증명이 된다고 해요. 첨단을 걷는 분일 수록 이 세상을 이끄는 앞서는 분일 수록 더 윤회설은 분명하다, 아주 확실하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요.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아주 자세하게 미주알 고주알 말씀해 놓으셨지만 근기에 따라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쨌든 사람 몸 받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불자로서 사람 몸을 잃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걱정스럽다”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늘 자기의 삶을 반성하고 참회하고 진지하게 비추어보아서 과연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정말 윤회가 있어 윤회를 초탈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 공부는 “열심히 해야한다” “잘 해야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참구에 죽음이란 말을 많이 빗대어 썼습니다. “죽자 살자” “막 죽음을 무릅쓰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다.”  즉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이 공부에 매달려 애쓰고,  노력하여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것이 바로 이 공부다” 라는 말씀들을 했습니다.

그렇게 애쓰는 분, 그렇게 대단한 생각을 하는 분, 그렇게 진지한 마음을 내는 분, 그런 분들은 이외로 쉽다는 거래요. 그래서 여반장이라 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거래요.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손바닥 뒤집는 일인데 그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겁니다. 흔히 세수하면서 코 만지기보다도 쉽다고 합니다. 세수 하다 보면 손에 코가 으레 닿게 돼요. 그것보다 쉽다는 거래요. 그래서 쉬운 일중에 쉬운 일이 바로 이 공부다 합니다.

우리 선원에는 아직 써 붙이지는 않았는데 디딤돌 옆에 보면 웬만한 선원에는 조고각하(照顧脚下)다 그런 한문으로 붙여놓은 글귀가 있습니다. 발아래를 바로 보라는 거래요. 바로 보는 그 자리가 부처자리라는 거래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앉아계시지마는 이곳에 앉은 자리를 바로 보면 그 자리가 부처자리라는 거래요. 자신이 곧 부처고요.

그러나 형식적으로 흉내만 낸다든지 화두가 될 만큼 하지도 않은 그런 사람은 참 도무지 기약이 없는 일일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 공부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공부는 발심이고 참으로 하고 싶은 마음(발심)과 그 성의가 아주 문제가 된다는 거래요. 화두가 안되는 사람은 자신을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화두할 생각이 있는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정말 진심에서 발심했는가? 참으로 대도를 걷는다고 하면서 과연 내가 이 길을 걸을 만한가?

좀 강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어쨌든 이 공부는 발심만 하면 참으로 마음만 내면 ‘이외로 쉬운 공부다’ ‘아주 쉽게된다’ ‘바로 된다’ 그런 생각을 늘 하시라는 것이 옛 어른들의 한결같은 말씀이래요. 우리 몸뚱아리 밖에서 뭘 구하고 얻고 하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그만큼 노력이 있어야 되고, 희생을 하고 봉사 정신도 가질 때는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내 마음 속에 있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을 바로 보고 바로 느끼면 되요. 그래서 쉽다는 거래요. 그래서 “마음이 참으로 문제다‘ 그런 말을 합니다. 어쨌든 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할 때는 하라는 것이고 그렇게 하라는 거래요. 그것이 향상하는 일이래요. 그것이 잘 되게 하는 일이래요. 끊어지지 않아야 돼요. 하다가 말다가 들다가 말다가 그러면 화두는 안됩니다. 안되는 화두라도 꾸준히 끊임없이 연결이 되도록, 계속 이어지도록 즉 간단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물 흐르듯이 하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할 때는 한 순간도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돼요.

화두로 먹고 화두로 입고 그렇게 늘 언제 어디서나 아침에서 밤까지 시끄러운 곳에서나 고요한 곳이거나 틈이 없어야 돼요. 자거나 깨거나 늘 화두가 들려있어야 돼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성낼 때나 괴로울 때나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도록 해야 됩니다. 사실은 집에 계시는 분들, 마을에 계시는 분들은 그리 하기가 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우리 스님들이나 또 선원의 보살님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마을에 계신 분들도 오늘 저녁 같을 때 기회가 왔을 때, 그 때는 한 순간도 놓치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려고 애써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는 조금도 쉼이 없어야 돼요. 간단(間斷)이 있어서는 안돼요. 쉼이 있고 간단이 있으면 그것은 화두참구가 아니래요.

쉼이 있으면, 끊임이 있으면 그것은 화두공부가 아닙니다. 화두공부는 잠시라도 중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단이 돼도 된다면 그것은 화두 공부가 아니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도(道)는 잠시라도 여읠 수가 없어요. 여의였다면 도가 아니래요. 만일 털 끝 만큼이라도 틈이 있다면 그 틈으로 마의 경계가 생깁니다. 화두참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것이 향상하는 길입니다. 즉 잘되게 하는 길이래요.

그래서 화두 참구는 닭이 알을 품듯이 하라 했습니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늘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닭은 더위를 많이 탑니다. 한 여름에 그냥 다녀도 입을 쩍 벌리고 헐떡거리면서 다닐 정도래요. 그만큼 더위를 많이 타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알을 품고 둥지 위에 앉아 있으면 더 더워합니다. 둥지 위에 앉아서 숨을 몰아서 쉬면서 헐떡거리면서도 내려오지 않아요. 왜 내려오지 않느냐? 하면 자기가 품고 있는 계란을 식히지 않으려고 식힐려고 그럽니다. 계란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병아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심하게 덥고 목마를 때 그럴 때는 잠깐 내려왔다가는 얼른 다시 올라갑니다.

계란은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야 병아리가 되듯이 그렇듯이 참선자는 화두끼가 늘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늘 화두가 있어야 돼요.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무슨 일을 하든 심지어는 자면서도 아무리 깊은 잠에 들어있어도 아주 성성하고 적적하게 화두가 들려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새벽에 일어나 눈만 딱 뜨면 들려있을 정도가 되야 해요.

항시 움직이거나 앉거나 화두가 없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화두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참선자에게 화두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화두가 없으면 죽은 자와 같습니다. 나는 참선자가 아니다 나는 밥값도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옛날 어떤 스님은 (화두없는 참선자는) 송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화두가 안되면 송장과 같다는 거예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거래요. 화두 없는 공부인은 공부인이 아니래요. 화두 없는 수행자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두는 아주 고집스럽게 아주 끈질지게 들어가야 합니다. 한번해도 안되면 열 번 스무번 하고요. 열 번 스무번 시도해서 안되면 백번 천번 하고요. 그래서도 안되면 만번 십만번 하는 거래요. 화두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애쓰고 애쓰라는 겁니다. 즉 끈질기게 아주 고집스럽게 하라는 거래요. 그래서 옛날부터 절 밑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지독하다, 지독하다, 참선하는 스님보다 지독할쏘냐?” 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지독한 독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애쓰다가 손에 딱딱 잡히는 순간까지 애쓰라는 거래요.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참으로 좌탈입망, 앉아서 가시고, 조사열반 즉 조사스님들의 그 거룩한 큰 스님의 모습을 보이듯이 아주 좋은 모습으로 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두참구는 끈질지게 아주 고집스럽게 하되 집착은 말아야 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애쓸 때는 애쓰되 집착은 말아야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듯이 애쓰고 애쓰되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애쓰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사량심이 됩니다. 즉 번뇌와 망상심이 됩니다. 공부를 참으로 어렵게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심을 지어가며 참구를 하되 참구한다는 생각 없이 하라는 거래요. 오직 참구 그것만 제대로 하라는 거래요. ‘내가 공부합네’ 하는 이런저런 집념을 내서 하지 말고 오직 그 자체만 애쓰라는 거래요.

그래서 화두하는 분은 과거도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사량을 붙이지 말고 현재에 대해서도 조금도 미련을 갖지 말고 이 순간 오직 화두 그것에만 애쓰라는 거예요. 그래서 참으로 직관이 되도록 하라고 합니다.

화두요령은 첫째는 간절하게 하는 거래요. 둘째는 아주 성심성의껏 하시고요 셋째는 끊이지 않게 늘 여여(如如)하게 일여(一如)하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화두가 간절하지 않더라도 늘 간절하게 들려고 애쓰다보면 화두에 의정이 납니다. 처음에는 조금 강하게 나가다가 약하게 나기도 하고요, 그런가하면 어떤 의심이 일자로 주욱 나듯이 비슷하게 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미적지근하게 나가다가 이내 끊어져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나가든 (화두가) 끊어지지 말자 바로 얼른 화두를 챙기셔야합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고 늘 화두가 지속되도록 되어야 합니다. 물 흐르듯이 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의심을 한번 한번을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작품을 만들듯이 그렇게 애쓰고 애쓰다가 보면 어느 날 화두를 간절하게 들지를 않았는데 화두가 아주 간절할 때가 있어요. 간절한 순간 화두에 힘을 얻어요. 그러면 진정한 의정이 생깁니다. 그렇게 의정이 생길 때는 의정이 확 일어날 수가 있어요. 자기가 놀랄 정도로 그렇게 강하게 일어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그럴 때 아주 애써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통은 화두에 진의가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약하게 일어나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약하게 일어나요. 그러나 자상하게 느껴보면 “아 이것이 진의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진의다 느낄 때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는 그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말고 더 애를 쓰고 더 노력을 하는 거래요. 밥 시간이 되도 밥도 먹지 말고, 잠잘 때가 되면 잠도 자지 말고, 아주 급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고 놓치지 않고 매달리듯이 애쓰고 애쓰다 보면 몇 십분 몇 시간이 지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면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고, 앉으나 서나 늘 현전하고 아주 소소영영합니다. 

그런 것을 진짜 의심이다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진의가 일어나면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그 때는 용맹정진해야합니다. 그렇게 놓치지 않고 애를 쓰다보면 의단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좀 된다 싶을 때, 진의가 났다 할 때는 모든 것을 바치듯이 죽자 살자 아주 용맹스럽게 막 물고 늘어지듯이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참으로 만족스러운 화두가 되어서 성성하고 아주 적적한 상태가 됩니다.

고봉 스님 말씀에 “화두는 기왓장을 우물 속에 넣으면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다가 바닥까지 가라앉듯이 마지막까지 끝장을 보듯이 하라” 했습니다. 즉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말고 끝장을 보듯이 참으로 애를 쓰라 했습니다. 참으로 애 쓸 때가 바로 그럴 때입니다.

화두는 아주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듯이 그렇게 지어가라는 것이 바로 참두참구의 요령입니다. 화두가 안되는 사람은 자신을 잘 점검을 해보세요. 우선 자기 마음부터요. 내가 정말 화두할 마음이 있느냐 참으로 점검을 해서 무엇이 부족한지 어디가 문제인지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하나 하나 따지듯이 그 문제점이나 부족한 점, 못난 점, 어리석은 점, 고칠 것은 바로 고치고 버릴 것은 당장 버려서 그래서 꾸준하게 자기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시정하면 화두는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이 공부는 자기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야 돼요. 그래서 이 공부를 위해서 참으로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그런 대단한 마음까지도 지극하게 가져야 참으로 큰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최상의 길을 걷고 있어요. 사실 이상의 길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최고의 길을 걷는다” “최고의 인생을 살아간다” 하는 어디가서라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는 사람일수록 참으로 그럴만한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참선자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예사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부족하면 반드시 고쳐야하고 문제점이 있으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합니다.

어쨌든 자기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들여다보고 다스릴 줄 알아야 ‘참으로 큰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야 말로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그 복을 수십생 전부터도 알았지만 깨치고 나서 정말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시면서 늘 자기의 인생살이를 정말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잘 사느냐, 내가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할 수가 있을까, 하고 항시 관심을 가졌다는 거래요.

그래서 “이 공부 하는 분에서는 향취가 나야된다” 그런 말을 합니다. 주변에서 향취가 날 정도로 즉 잘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그래서 존경스럽다, 훌륭하다, 거룩하다, 그런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살아야 된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길이 참으로 영광스럽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영광스러운 그 길을 어떻게 참으로 빛낼 수 있을까? 어떻게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애쓰고 애써서 훗날 후회없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정리 : 서암 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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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님의 댓글

박현숙 작성일

늘상 의심의 소지로 두려움과 지내곤했습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큰스님 말씀을  이제와서야  조금 이해가 됩니다. 집착하지 않는것. 중생이  살면서 과연 될까?  가슴속에  의문으로만 자리잡고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해답을 얻어가고 있는것 같아 환희심?
큰스님 말씀 깊이새겨 더욱 공부 해보겠습니다.  근면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