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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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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8:15 조회4,4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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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삽시다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은 지장기도 입재일입니다. 지장기도는 매년 음력 7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연중 행사로 봉행하고 있습니다. 동참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은 지장보살님께 지극하게 기도하여 먼저 가신 부모님과 조고조상(祖考祖上) 및 법계(法界)의 일체애고혼(一切哀孤魂)이 천도되어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현세의 부모와 일가친족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잘되고, 소원성취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사대명절의 하나인 우란분절(盂蘭盆節) 또는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시방(十方)에 산재해 있는 유주무주(有主無主) 애고혼(哀孤魂)과 악도에 떨어져 신음하는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법락(法樂)을 얻게 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오늘부터 보름 동안 원력(願力)이 크신 지장보살님께 기도하여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부터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六道)에 몸을 나투어서 “나의 성불을 뒤로 미루더라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서원을 세우고 오늘도 지옥 문전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효행은 내 가족이나 내 조상뿐만 아니라 일체중생과 일체애고혼이 다 포함됩니다.

여러분의 지극하고 간절한 기도와 지장보살님의 지중한 원력이 먼저 가신 모든 영가와 현세의 일가 친족에게 진정한 효행의 계기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도 여러분!

이번 호의 법문은 ‘바르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부모나 어른들은 흔히 어린이나 젊은이에게 ‘바르게 살아라 ’ ‘잘 살아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사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지’ 정작 자신도 잘 모르면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불교의 심오한 교리로 말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八正道)로 살아가면 잘 사는 길이라는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불자 여러분께서도 팔정도를 잘 이해하시고 인생을 잘 사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고 난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교진여(嬌眞如)등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법륜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교법이 중생의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윤보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 같으므로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설하신 내용을 뒷날 편집한 경전을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합니다. 『아함경』 가운데 기본적이고 핵심이 되는 내용은 사성제법(四聖諦法)과 팔정도(八正道) 및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입니다.


팔정도는 범어로 Aryastanga-Marga(아리아스 탕가 마르가)로 팔성도지(八聖道支), 팔정도분(八正道分), 팔현성도(八賢聖道), 팔품도(八品道)등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르고’ ‘어질고 성스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道)는 곧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를 구체적으로 우리 생활에 비교하여 여덟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신 것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이 팔정도는 부처님이 초기교단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신 행위의 규범이고 실천의 규범입니다. 정도란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삶의 길입니다.

그런데 중도라는 말은 세상에서 보통 쓰는 용어와는 다릅니다.

중도라는 의미는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나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삼자로 연상하거나, 정치적인 용어로 말할 때는 좌파와 우파의 중간인 중도파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는 ‘있다 없다(有無)’나 ‘끊었다 항상한다(斷常)’의 두 극단을 여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 되는 것도 아닌 이치를 중도라고 말합니다.

『금강경(金剛經)』에 보면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말씀이 있는데 이런 마음이 되어야 중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올바른 삶의 방법, 지혜로운 생활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을 세분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정견(正見)을 가지십시오.

불교에서는 정견을 강조합니다. ‘정견을 가져라. 정견을 가져야 이 공부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며 정견에 대한 간절한 말씀을 많이 합니다.

불자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정견을 가지십시오. 정견(正見)이란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견해를 사상 또는 안목(眼目)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사상 즉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말합니다.

불교적인 인생관과 우주관은 어디까지나 공(空)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공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고 단지 인연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 인생까지도 포함해서 일체 존재는 영구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항상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변화는 어떤 절대자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생기므로 이것이 생긴다.”


는 것입니다. 이 연기의 법칙은 불교의 중심사상입니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뜻으로,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존재는 상대적인 의존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계해서 또 다른 존재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원인을 제공합니다. 우주만물(宇宙萬物)은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겹겹으로 끝없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하여 만물이 무상하지만 일정한 법칙으로 연기하게 됩니다.

『잡비유경(雜譬喩經)』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나무가 있었는데, 그 열매의 크기는 두 되들이 병만 하였다. 그 열매가 익으려 할 때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나무에 앉았다가 열매에 치여 죽고 말았다. 나무신(樹神)은 그것을 보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까마귀가 죽으러 온 것이 아니요

까마귀를 죽이려 열매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열매는 익고 까마귀는 죽어야 했으니

인연이 모여 그렇게 된 것이다.


경전에는 열매가 익고 까마귀가 죽는 것까지 인연의 소치라고 하였습니다. 『설법명안론』에는 “한 그루 나무 그늘에 깃들며, 한 하천의 흐름을 퍼 올리는 것도 모두 전생으로부터의 인연이다.”고 했습니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도, 그 누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닫고, 깨달음을 완성한 뒤에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연설하고 이를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연기의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합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사무쳐 보지 못함으로써 엉클어진 실과 같이 그 속에 얽히어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악취(惡趣)에 윤회하여 해탈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연기설의 체제가 정비된 것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입니다. 한 때는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는 자가 불법을 안다고 해서 연기를 불법 그 자체와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연기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결국은 허망합니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사라지고 맙니다.

불자는 이 순간도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백옥같이 하얗고 예쁜 얼굴도 결국은 그 흔해빠진 흙으로 변할 것이고, 때로는 아끼고 소중하던 피나 눈물이나 오줌도 물로 변할 것이고, 그 따스하고 온화한 체온은 대기의 온도 일부로 사라지고 말 것이며, 힘은 바람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흙과 물과 불기운과 바람기운 등 사대(四大)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한 괴로움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연기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괴롭다, 괴로움 뿐이다’ 라고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연기로 이루어진 것은 괴로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천년만년 꿈쩍 않을 것 같은 뒷산 바위도, 큰 바위가 작은 바위가 되고, 자갈로 모래로 변하고 있습니다. 근사하게 지은 이 법당도 서서히 쓰러지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사는 연기로 이루어진 세상은 괴로움 덩어리요, 괴로움 자체입니다. 인생도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지만 ‘나도 성불할 수 있다’ ‘나도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견이란 사물의 진실을 바로 보는 마음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정사유(正思惟)는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세웠다면 다음에 필요한 일은 올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괴로운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떠나려면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바르게 알고 그에 따라 바르게 실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실천이 되고 바른 수행이 되려면 하는 바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아무리 사물의 이치를 사실 그대로 보아 안다고 할지언정 마음에 그것을 생각함이 바르지 않다면 다음의 행동이 그릇될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정견에 의해 편견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을 정사유라 합니다.


셋째, 정어(正語)는 바르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로 보고 다음에 바로 생각한 후에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듯이 불자라면 바른 말, 곧은 말, 옳은 말을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어른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어른이며, 속이는 말은 하시지 않는 어른이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을 따라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말은 그 자체로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자성(自性)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오로지 말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중생이 그 입에서 생겨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지키는 길이다.”하였습니다.

바른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 몸을 도끼와 칼처럼 상하게 할 것입니다.


바른 말이 아닌, 참되지 않는 말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1.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바른 법을 그른 법이라 하고 그른 법을 바른 법이라 설명하는 등 마음을 어겨서 하는 말입니다.

2. 비단결 같은 말입니다.

비단결 같이 번지르르하게 하는 말입니다. 뜻도 없고 이익도 없는 말로써 남이 듣기 좋게 화사하게 하는 말입니다.

3. 두 가지 말입니다.

두 가지 말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해서 둘 사이를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4. 악담(惡談)입니다.

추악한 말로써 남을 욕하고 분노케 하며 저주하는 말로써 상대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는 등의 폭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거짓말 한 열 가지 해를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1. 입에서 악취가 나고,

2. 선신이 멀리하며,

3. 바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며,

4. 지혜로운 모임에 참여할 수 없으며,

5. 항상 비방을 당하고 더러운 소문이 퍼지고,

6.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고, 비록 가르치거나 타일러도 사람들이 받들어 쓰지 아니하며,

7. 언제나 근심 걱정이 많고,

8. 비방을 받을 인연을 심으며.

9. 죽으면 악도에 떨어지고,

10. 벗어나서 사람으로 출생한다 하여도 늘 비방을 받게 된다.


불자는 거짓말이나 하는 악당이 되어 지옥 문전에 이르지 않아야 하고, 거짓말이나 하는 구린내 나는 입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정업(正業)은 바른 신체적 행위를 말합니다.

불자라면 행동은 바르게 착하게 어질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처럼 거룩하고 훌륭하고 존경스럽게 해야 합니다.


1. 살생하지 말고, 방생하고 자비합시다.

불자는 살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해서 죽이거나 주문으로 죽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외 어떤 방법으로도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왜 살생을 안 해야 하는가? 생명보다 고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만 귀중하게 여기지만 어떤 생명체라도 내 몸처럼 존중하고 보호돼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한결같이 자기의 생명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집념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찮은 생명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독사가 무는 것도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섭니다.

생명이란 그 누구의 것이든 공경해야 하고 보존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산 생명은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은 것일지라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또 살생은 자비의 종자를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계율에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제 1계로 삼은 것은 보살 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자비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참된 불자라면 자비해야 합니다. 『법구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고 보호하듯이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자비한 눈으로 중생을 본다면 복덩어리는 바다와 같이 무량하다.”고 하였습니다.

불자여! 자비합시다. 불자는 자비가 뚝뚝 흘러야 합니다. 자비를 떠나 불법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생명체라도 내 몸처럼 아끼고 보호해야 합니다.


2.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많이 베푸십시오.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맙시다. 불자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인심이 아무리 타락하고 추악해지더라도 불자는 깨끗하고 여법하고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할지언정 어찌 남의 것을 탐낼 것이며 도둑질하리요.

『사미십계명』에서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손을 끊을지언정 옳지 못한 것을 갖지 말아야 한다.”하였으며, 옛 선사는 “보살이 훔치는 것을 끊지 않고 수행한다는 것은 새는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서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새는 항아리로 물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불자의 마음은 맑고 깨끗하여 백지장 같고,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같아야 합니다.


계율에서도 투도계(偸盜戒)를 강력하게 금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1. 지은 바 업은 반드시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훔친 물건은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설사 훔치지 않더라도 남의 재산을 탐내는 사람은 인색하게 되고, 사랑도 인정도 없는 냉혈한이 됩니다.

2.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불성을 등지는 행위이므로 미혹하게 하여 끝없는 생사의 고뇌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세 사람의 도적이 어떤 부자 집을 털었습니다. 돈 자루를 매고 달리다가 어느 산간의 빈집에 이르렀습니다. 세 사람은 의논하여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갖기로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술을 사러 갔습니다. 가다가 생각하니 남아 있는 두 놈을 독살하고 전부를 차지하겠다는 마음을 냈습니다. 그 동안 남아있는 두 도둑은 사러간 도둑의 몫을 반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두 도둑은 목 졸라 죽였습니다. 두 도둑 역시 기분 좋게 독약을 탄 술을 마시고는 죽고 맙니다. 방안에는 임자 없는 돈 뭉치와 술병만 뒹굴고 있었습니다.


불자들은 투도하지 않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뭇 중생들에게 본바탕 깨끗한 마음으로 자비심과 효순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재물과 선업을 능력껏 베풀고 중생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해서 복이 되고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로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음란(淫亂)하지 말고 깨끗하십시오.

불자는 음란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가승은 어떤 음행도 금해야 하고, 재가는 삿된 음행만 금하고 있습니다. 삿된 음행이란 자신의 처를 제외한 일체의 여인을 범하는 것이고, 자신의 남편을 제외한 모든 남자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그렇게 음행을 금했을까요?

1. 중생의 음행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모든 기멸심(起滅心)을 조장하고 번뇌의 뿌리가 되어 해탈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2. 음행은 청정하지 못한 비범행이요, 물들고 추한 행인 염오행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행위는 밝은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청정한 마음을 물들입니다. 그것은 어둡고 탁한 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깨끗이 산다는 것은 성적으로 음란하지 않고 청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성이 상품화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고, 저질 성문화가 판을 치고 성의 노예화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윤리와 도덕은 점점 상실되어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 때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어지던 나라가 이제는 수치스런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대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도 도덕적 타락에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나라도, 집안도, 인간도 망하게 됩니다.


『십선업경(十善業經)』에 사음을 범하지 않는 공덕을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 모든 본능의 감관을 조복하고 순종시킨다.

2. 시끄러운 비난의 길이 여의게 된다.

3. 세상이 다 칭찬하는 바가 될 것이다.

4. 정숙한 아내, 점잖은 남편을 얻게 될 것이다.


다섯째, 정명(正命), 바른 생활을 합시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따로 분리시켜 살 수 없습니다. 그간 삿된 견해나 사상을 가져 삿된 업을 지어왔거나 또는 비불교적 사상을 가져 비불교적 업을 지어왔다면 이제는 바른 견해, 바른 지혜를 가지고, 마음으로는 바르게 생각하고, 입으로는 바르게 말을 하고, 몸으로는 바르게 행동(正業)하여, 이것이 합쳐져 전체의 우리 생활이 바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또한 직업도 올바른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에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도둑질을 업으로 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것을 생업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직업도 가능한 부처님의 자비 보시사상과 대승적 보살행을 실천하는 직업이면 바람직합니다.


여섯째,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합시다.

정진이란 노력을 말합니다. 어떤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꾸준히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정견(正見)에서부터 정명(正命)까지를 한다하여도 그것이 일순간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요, 끝없이 이어져야만 합니다. 바로 올바른 이상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인생에 성공을 바라거든 서원을 세우십시오. 서원(誓願)은 맹세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 ‘내가 어떤 것은 꼭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원을 세워서 소원을 향하여 힘껏 정진하십시오.

원(願)은 그 사람의 희망이요, 포부요, 목표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희망이 있고 포부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내일이 없는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젊은이일수록, 성공을 바라는 사람일수록 희망과 포부가 충천해야 합니다. 목표를 세웠으면 목표를 향하여 성심성의껏 노력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지극하게 해야 하고 최선을 다하듯이 해야 합니다.

속담에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고 했습니다. 또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희망과 포부를 위해서는 때로는 하늘도 감동할 정도로 해야 하고, 무쇠덩어리도 바늘이 되듯이 힘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값져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섬유 수출회사에 취직해서 10여년을 성실히 근무했습니다. 어느 해 회사가 어렵게 돼 월급도 제 때에 받지 못하게 되자, 직원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회사는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혼자 도맡다시피 하여 3년여를 근무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일을 맡다보니 자연히 회사 실무는 물론 경영과 망한 회사 정리하는 법까지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사장마저도 손을 떼면서 그에게 회사를 맡아보라고 권했습니다. 다 아는 일이라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처분하지 못한 몇 가지 시설을 양도 받아 회사를 새로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뜻밖에도 국제 경기가 호황을 맞아 예전보다도 더 큰 회사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주위에서도 그의 출세를 축하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그 후 갓 대학을 졸업한 조카가 인사를 온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 몸담았던 회사의 곤경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주위의 욕과 비난을 들으면서도 회사를 지켰던 것인데, 이제 생각하면 그것이 주인 마음이구나. 되면 붙어있고 안되면 떠나간다는 것은 언제라도 남의 집 사는 사람의 마음이고, 설사 못 돼서 어려워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주인인데, 그렇다면 그 때 내가 주인마음을 쓴 것이고, 마음이 주인이었던지라 결국 사장이 된 것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회사에서 일을 하자면 꼭 그러한 주인 되는 마음으로, 혹 이것이 남의 회사라는 생각으로 소홀함이 없었나 항상 살피고 맡은바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성공을 바라고 출세를 바라거든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위의 사장처럼 주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의 일이든 회사일이든 또는 그 어떤 일도 자기 일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성심껏 노력해야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은 대우나 환경에 너무 집착한다고 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 입사한 회사라도 다른 곳에서 좋은 조건만 제시하면 인정도 체면도 없이 옮긴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 없고, 삶의 가치와 보람을 느끼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목표를 향하여 외길을 걸어야 하고 정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우물을 파듯이 열심히 살면 어디 가든 큰 성취를 이룰 수 있고, 남다른 대우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카르노’라는 대단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한 부호가 야간에 연회를 열고 조야(朝野)의 명사 수 십 명을 초대했습니다. ‘카르노’대통령도 이 연회에 참석했는데 다른 연회와는 자리배열이 달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그 자신이 앉아야 할 상석(上席)에 철도회사 기사장, 다음 자리는 모(某)문학자, 그 다음은 모 대학의 화학교수…… 순이었고, 대통령의 좌석은 열여섯 번째에야 있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이상했습니다. 내빈 중의 한 사람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누가 대신 할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사장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에 둘도 없는 기술자입니다. 때문에 난 그를 상석에 모셨고, 문학가 화학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인 카르노씨 에게는 심히 실례 되겠지만, 만약 카르노씨가 그 직에 없더라도 그것은 누군가가 대신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다시 말해 둘도 없는 사람이야말로 늘 상석에 앉아 마땅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이 말에 좌중은 깊이 감동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독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성공했다 하고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일생동안 자기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 남다른 공덕을 쌓으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에디슨’의 말씀에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천재성을 타고났다고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천재성을 꽃 피울 수 없습니다.

성공을 바라거든 서원(誓願)을 세우고, 자기의 이상인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정진해서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일곱째, 항상 정념(正念)을 가지십시오.

정념은 바르게 일심(一心)으로 전념한다는 뜻으로, 항상 바른 생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앞의 정사유(正思惟)는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말하는데, 정념은 올바른 생각을 항상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생이란 무상하다, 모든 것은 괴롭다, 나란 것은 따로 없다’고 하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사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생활함으로써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째,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禪定)을 말합니다.

정에도 바른 정이 있고, 삿된 정이 있습니다. 정정(正定)은 깨달을 수 있지만, 사정(邪正)은 깨칠 수 없습니다. 정념(正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에 아무런 번뇌나 망상이 없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산란함이 없는 일심삼배(一心三昧)의 경지를 정정이라 합니다.

삼매경지에 들어가면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고, 오묘하며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법열(法悅)까지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바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산란함이 있다면 정견(正見)부터가 이미 흔들리므로 만사가 바른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몽중일여(夢中一如)의 선정에서도 더 들어가 대무심지(大無心地)를 거쳐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투과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도 진일보(進一步)해야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가 부처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이 정도 돼야 진정한 안목(眼目)이 열립니다. 이 때라야 삼라만상 두두물물(森羅萬象 頭頭物物)을 여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정견과 정정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지(八支)는 정견에서 출발하여 정정(正定)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정정은 다시 정견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팔지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입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이상으로서 팔정도에 대하여 대강을 아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온통 ‘고통의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괴로움 자체고 괴로움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일체 사물까지도 인연으로 태어났고,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고 주장할 실체는 없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은 이 순간에도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괴롭다’, ‘괴롭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바다를 어떻게 슬기롭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즐겁게 살아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느낄 것인가? 그리하여 중생의 고해를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 괴로움의 근원을 끊어버리고 영원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 하심으로써 그 고해를 뛰어넘어 지극히 행복한 이상낙원을 체험하시고 고구정녕(苦口丁寧)하고 노파심절(老婆心絶)하게 일러주신 말씀이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말씀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史)』를 쓰신 일연(一然)스님 같이 “고기 알은 많아도 물고기 되는 것은 적으며, 마음에 뜻을 세우는 사람은 많을지라도 길에 들어가는 이는 적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발심하고 신앙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알면, 어찌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함경』에 거듭 말씀하시기를,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마치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둠은 곧 없어지고 밝은 광명이 차고 만다. 지혜의 등불은 어리석음의 어둠을 없애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불자 여러분께서는 팔정도의 길을 당당하고 꿋꿋하게 걸어서 지혜의 광명을 밝히고, 괴로움의 근원도 끊어버리고 생사계의 윤회마저 소멸케하여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시기 바랍니다.


축서사 법당에 모신 금부처님이 사자후(獅子喉) 하니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서는 하얀 파도가 일고

낙동강(洛東江) 물속에서는 뿌연 먼지가 일어나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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