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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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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11-08 13:51 조회4,86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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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

 



무여 큰스님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 시월 초하루는 유서 깊은 문수산 축서사에서 매년 연중행사로 열리는 100일 관음기도 입재일입니다. 동참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자비 광명(慈悲光明)이 가득하여, 하시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하시어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도 알차고 보람 있는 해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혹여 만족스럽게 사시지 못한 분은 마지막 그날까지 절실하게 기도하면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말만 들어도 합장이 되고, 희망과 용기가 솟구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나는 잘못 사는 사람이다.’ ‘나는 괴로움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는 생각을 하며 부족하고 어리석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해 보십시오. 또한 장래 희망과 포부와 목표가 충천하는 사람일수록 성심성의껏 해보시고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신도 여러분께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백일기도를 하시고, 평상시에도 기도를 하시고 또 특별기도도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됩니까? 기도하시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십니까?

기도는 마음이 문제가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도를 흉내만 내듯이 하는 분은 별 효험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열심히 지극하게 하시는 분은 대단한 보람과 긍지를 느끼실 것입니다. 기도는 하면 하는 것만큼 애쓰면 애쓰는 것만큼 공덕이 쌓입니다. 가피(加被)나 느낌이 없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더 지극한 신심을 내시고 더 굳건한 원력을 세워서 열심히 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자기를 개발하고, 자기를 완성하는 깨달음으로 가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라 마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반드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안하면 자기 손해입니다. 이번 기도에는 가급적이면 온 식구가 해보십시오. 흔히 기도나 염불은 여신도들이 주로 하는 것으로 잘못 아시는 분이 많습니다. 기도는 성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나이나 직업에도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학생이나 직장인은 아침에 108번, 저녁에는 1080번 정도는 해보시고, 주부나 여유가 많은 사람은 하루에 2만번 또는 3만번 이상 해보십시오. 아침 저녁기도를 마치고는 반드시 축원을 하십시오. 축원은 평생의 서원을 간절하게 하십시오. 속담에도 ‘빌면 무쇠도 녹는다.’고 했고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움직이고 만물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떠한 소원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께서는 100일 기도를 열심히 하셔서 가피와 보람을 진정으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이번 호 법문은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으로 하겠습니다.

요즘 세상의 화두가 온통 ‘웰빙’과 ‘웰다잉’이라 합니다. 유럽이나 미주 등 선진국일수록 폭발적인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바라는 희망이요, 목표요,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웰빙(Well-being)’은 영어로 ‘웰(well)’과 ’빙(being)’의 합성어입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건강한 (well,안락한,만족한) 삶 (being,인생)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참살이라고 합니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 안녕, 복지 등입니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웰빙’은 몸과 마음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건강한 심신을 유지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삶의 유기적 조화를 통해 인생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영위하고자 하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자신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육체적인 건강과 정서적인 안정을 함께 쫓는 삶의 방식이고, 행복을 구현하기 위한 모든 소비와 사회활동과 관련된 생활양식 등으로 그 개념이 포괄적이고 다양합니다.

‘웰빙’은 2000년 이후 미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우리 국내에 ‘웰빙’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말부터라고 합니다. 여기서 파생된 신조어인 ‘웰빙족’은 물질적 가치나 명예를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보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균형 있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국내의 ‘웰빙족’은 도심의 공해와 현대인의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몸의 평화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먹는 것은 패스트푸드(고기류) 대신 유기농 야채와 곡식으로 만들어진 건강식을 섭취하며, 화학조미료와 탄산음료를 꺼린다고 합니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서양식의 식사 대신 가정에서 생산하거나 만든 생식을 즐긴다고 합니다. 그 값으로 향긋한 온천 마사지나 발마사지를 즐기며, 퇴근 후에는 휘트니스클럽이나 요가센타 등을 찾아 하루의 스트레스를 건전하게 날려 버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요즘 우리 도시사회는 ‘웰빙’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려는 관심은 수퍼마켓마다 넓다란 유기농 코너를 만들었고, 때 아닌 전원주택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놓칠세라 TV에서도 아침저녁의 중요한 시간대를 할애하여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웰빙’은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코드로까지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웰빙’에 관심이 높아져가는 이유는 사회인들의 삶의 질 향상욕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물리적 가치나 명예를 얻기 위해 죽자 사자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이 자기의 가치를 올린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요즘 ‘웰빙’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돈을 적게 벌더라도 나를 위한 여가 시간이 많은 직장을 선택하자. 나의 삶의 기회를 확대하자.’ 그래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균형 있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우리 사회에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웰다잉’은 ‘안락한 (well,아름다움) 죽음(dying)’을 말합니다. 두려움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아름답고 품위 있게 잘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확실히 맞이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무엇보다 처절하고 비참하고 허망합니다. 속담에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하고 ‘죽은 석숭(石崇:중국 진나라때 유명한 부자)보다 산 돼지가 낫다.’고 합니다. 아무리 정승이고 유명한 부자라도 죽은 사람은 산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라도 면하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괴로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해보려는 인간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바로 ‘웰다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안락한 죽음, 행복한 죽음인 ‘웰다잉’을 맞이하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웰다잉’이 ‘웰빙’의 완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성자 달라이 라마께서는 ‘우리가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인도의 현자 오쇼 라즈니쉬는 ‘종교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과학이요 예술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잘 살았다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했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이 안락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자(臨死體驗者)나 죽음에 대한 귄위자들의 괴로운 죽음을 행복한 죽음으로 바꾸기 위한 다섯 가지 메시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참고하고 실천하셔서 ‘웰다잉’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죽음을 이해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지의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죽음 역시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무작정 두려움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죽음을 부정적인 것, 완전한 소멸이나 허망(虛妄)쯤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4가지로 평등합니다. 즉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것,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 어디서나 죽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 어디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간의 삶에 너무나 필연적인 것이므로 삶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죽음을 특별히 두려워할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는 먼저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육체적 삶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앞에서 삶의 외적인 조건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벌거벗은 ‘나’만이 문제될 뿐, 죽음은 우리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 ‘나는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질문만 던집니다. 죽음은 우리의 자아가 삶을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시험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영혼의 마지막 성장’이라고 일컫는 것이며, 그것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먼저 삶을 의미있게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셋째, 죽음의 모습은 여러 가지이나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한 사건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제각기 다릅니다. 절망과 두려움, 부정, 분노, 슬픔, 삶의 마무리, 수용, 희망, 여유와 희망, 밝은 죽음 등 9가지 태도입니다. 죽음의 모습이 부정적인가(앞의 5가지), 긍정적인가(뒤의 4가지)는 삶의 내적 가치를 얼마나 성취했느냐, 죽음을 얼마만큼이나 준비해 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죽음은 결국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죽음 이후에도 삶은 어떤 형태로든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동서고금의 이야기를 보면 죽음 이후가 완전한 소멸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호스피스 종사자들의 증언, 임사체험자들의 다양한 이야기, 위대한 종교의 가르침, 빙의 현상, 티베트 바르도 철학 등이 일관되게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에 제시된 철학은 인간의 삶을 탄생과 죽음의 사이에 걸쳐진 과정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면 삶의 다양한 모습도 이전의 삶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삶도 다음 삶을 위한 것으로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됩니다.


다섯째, 존엄한 죽음은 최소한의 준비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실천사항을 열거했습니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 그간 이룩한 삶의 가치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있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막연한 노력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1. 자신의 죽음 방식을 묻고 답하기

2. 갑작스런 죽음에 대비해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 리빙윌(Living Will) 작성하기

3. 삶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하기

4. 장례방식과 장기기증 여부 결정하기

5. 유서 쓰기

6. 이웃과 사랑 나누기

7. ‘웰다잉’을 위한 명상 등


이상과 같은 ‘웰빙’과 ‘웰다잉’이 요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말하는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고, 누구나 갈망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웰빙’은 몸과 마음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 인생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영위하고자 하는 새로운 스타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생활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생활이나 음식 또는 여가를 즐기는 것은 좋으나 마음의 평화를 얻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웰빙’이라는 말을 쓰기는 미흡하고 불만스럽다는 것입니다. ‘웰다잉’도 누구나 바라는 안락한 죽음, 행복한 죽음을 바랄 수는 어렵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나 괴로움은 다소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웰빙’과 ‘웰다잉’은 바랄 수 없단 말인가. 인간이 그렇게 갈망하고 요구하는 진정한 삶과 죽음은 기대할 수 없단 말인가? ‘웰빙’이나 ‘웰다잉’에 대하여 표현은 다르지만 고구정녕(苦口)하게 말씀해 놓으신 것이 경전이요,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 생사까지도 자재하는 모범을 보인 기록이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들의 어록(語錄)입니다.

이들 경전이나 어록의 한결같은 말씀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즐겁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하고, 인생대사(人生大事)인 생사를 자재(自在)하고 생사를 해탈하려면 견성성불(見性成佛), 자기의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웰빙’이나 ‘웰다잉’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의식주가 풍요롭고 소비가 미덕(美德)이라는 시대에 첨단제품으로 화려하게 산다 해도 마음을 닦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으려면 선을 해야 하고, 선중에서 최상승법은 화두선(話頭禪)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선수행으로 안락(安樂)한 견처를 체험해야 진정한 ‘웰빙’을 느낄 수 있고, ‘웰다잉’에도 자신만만 합니다. 안락한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면 참수행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안락(安樂), 수행에서 진정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이 말만 들어도 설렐 것입니다. 안락이란 수행이 잘 돼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안락한 상태의 극치가 바로 극락(極樂)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두에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 집중이 되면 일체의 번뇌나 망상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들끓어서 괴롭고 불안하던 온갖 생각들이 사라지면 마음은 아주 고요해 일부러 생각을 하고 기억을 더듬어도 고요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고요해지면 마음은 맑아집니다. 그러면 몸은 아주 가벼워지고, 때로는 새털처럼 가벼울 때도 있고, 자기 몸뚱이조차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기만 해도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옛 어른 말씀에 ‘몸과 마음이 편안하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느냐?’ 했듯이 더 바랄 것 없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보통 ‘웰빙’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런 정도는 화두선에서는 초보단계입니다.

여기에서 수행이 더 깊어지면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오묘한 법열(法悅)을 느낍니다. 심하면 자기를 억제하기조차도 어려울 정도의 기분을 느낍니다. 마음의 평화만 느껴도 온 몸에서 봄기운이 돌 듯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데, 즐거움까지 느끼면 인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고나 자세나 행동까지 달라집니다. 이때는 화두가 동정(動靜)에도 한결같이 되다가 꿈속에서도 변함없이 들리는 정도가 됩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항상 들리고, 심지어 책을 보거나, 사고(思考)를 하거나 글을 써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상태가 되다가 꿈에서도 한결같이 놓쳐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참선자라면 학생이나 주부나 직장인으로서 보람을 느끼면서도 일하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마음을 상당히 닦을 수 있습니다. 주부는 한 여성으로서 주부로서 수행자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늘 하는 일인, 밥을 짓거나 빨래나 청소를 해도 좋은 기분을 느끼면서 할 수 있고, 직장인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만족스러운 근무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어디가 아프다, 괴롭다, 소화가 안 된다, 몸이 찌뿌둥하고 나른하다 등 보통 안 좋다는 건강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웬만한 중병(당뇨, 암등)도 초기단계에는 치료 없이 낫는다는 임상결과가 있습니다. 특히 신경계통의 환자에게 특효가 납니다. 정신분열증이나 정신착란증 또는 요즘 젊은 사람이나 여성에게 급격히 는다는 우울증 같은 정신병 계통에 대단한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정신병 환자는 정신이 집중이 되어 일체 망상이 사라져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이 되는 상태가 되면서 서서히 좋아집니다. 정신병은 수행만 잘되면 옛 어른들은 ‘거짓말처럼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화두에 정신이 집중이 돼서 일체 번뇌 망상과 잡스런 생각이 다 사라지면 마음은 고요하고 안정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서 몸과 마음이 안락한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안락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행복한 삶, 즐거운 인생, 진정한 ‘웰빙’이라고 합니다. 이런 ‘웰빙’과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도심의 공해와 현대인의 바쁜 생활을 떠나 육신의 평화를 벗어나기를 추구하는 웰빙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낍니다. 이런 ‘웰빙’도 한때 짧은 시간동안 행복과 보람을 느끼겠지만, 그런 행복은 허망합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느끼는 ‘웰빙’은 한 번만 체험해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정도로 기억에 남아, ‘오직 그것뿐이다, 그것은 안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선자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화두는 더 성성하고 적적하게 참구해가야 합니다. 화두가 꿈속에서도 변함없이 잘 되다가 깊은 잠에서도 한결같이 들리는 정도가 되면 신통한 경계까지 느끼게 됩니다. 신통이란 보통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이 통한다 해서 통(通)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한창 정진에 열중하고 있는데 무심히 얼굴을 들고 전면을 주시하니 갑자기 벽이 사라지고 방 밖의 정경이 펼쳐집니다. 놀라서 더 자세히 집중하니 방 밖뿐만 아니라 원근에 관계없이 몇십리 몇백리 밖에 까지 보입니다. 더 자세히 주시하니 더 환하게 또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천안통(天眼通)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신통한 힘이 생기면 정수리로는 기상이 솟구치고, 날아갈 듯 합니다. 평소 다니기를 싫어하는데, 하루 종일 걸어도 지칠 줄 모르며, 걸음도 사뿐사뿐하여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본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 남의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데, 너무 당당하고 적극적이고 남성적으로 변합니다. 말이 적고 어눌하기도 하는데 폭포수처럼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지에서 어느 날, ‘아 생사(生死)가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생(生)이 곧 사(死)요, 사(死)가 곧 생(生)이라는 것을 느끼고, 본성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두가 안락(安樂)을 느끼는 경계가 되고, 신통한 경지를 체험까지 하면, 무슨 일이라도 자신만만해지며 심지어 하늘의 별이라도 딸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고, 본성은 영원하다는 확신까지 서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까지도 죽음에 당당해지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선에서는 이런 정도가 돼야 ‘웰다잉’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깨달음을 열어 생사까지도 자재(自在)하고 해탈(解脫)해야 진정한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생사를 자재한 옛 어른들의 일화에서 ‘웰다잉’을 참으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선사중에서 최초로 신비한 모습으로 입적한 선사는 선종(禪宗) 3조 승찬(僧璨)대사입니다. 대사는 법회를 열었던 큰 나무 밑에서 수많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 합장하고 조용히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습이 후대 선사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선불교가 중국 천지에 활짝 꽃피운 당(唐), 송(宋)시대 이후 한국, 일본의 도인들이 돌아가시는 모습도 여러 가지로 신비하고 기이한 모습을 보이며 죽음을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스님이 입적하시면 문상 간 객스님은 첫 마디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돌아가실 때 앉아서 갔는지, 서서 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세속의 보통 사람의 죽음처럼 인사불성인 상태로 괴롭게 갔는지를 묻고 그 스님을 평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대단한 선사는 몸을 바꾸기 며칠 전에 ‘내가 모일(某日) 모시(某時)에 가겠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은 두 가지로 해석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기의 의지를 말한 것이고, 즉 나는 모일 모시까지만 살다가 죽겠다는 선사가 생사를 자재한 선사라 할 수 있고, 내 생명이 모일 모시밖에 안 된다는 도인은 자기의 의지를 말한 선사보다는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들 생사를 자재한 선사들의 대부분은 좌탈입망(坐脫入亡), 즉 앉아서 가셨고 어떤 선사는 입탈(立脫), 서서 가신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스스로 화장하여 가신 선지식도 있고, 미리 관을 짜달라고 해서 관속에 들어가 죽기도 하고, 문도들에게 부도를 만들라고 하여 다 조성했다는 전갈을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가신 도인도 있습니다.


선사 중에는 참으로 대단한 도인도 있습니다.

관계 지한(灌溪志閑) 선사는 당나라 건녕 2년 5월에 시자와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고금 선사들의 임종 모양을 평하고 있었습니다.

‘앉아서 가는 것도 신기할 게 없고, 서서 가는 것도 신통치 않으며, 거꾸로 서서 가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예사롭게 말하듯이 일어나서 조용히 무겁게 앞으로 발자국만 떼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일곱 발짝까지 나아가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는 모습 그대로 돌아가시더랍니다.

참 대단한 선사입니다.


생사자재(生死自在)의 압권은 자기의 죽음을 마치 장난치듯 연출한 선사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鄧隱峰)스님은 어느 날 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제방의 큰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앉아서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야 신통할 것이 없는 것이고, 선 채로 몸을 바꾸면 좀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떤 고승이 대꾸합니다.

‘그렇습니다. 서서 간다면야 좀 특별하지요.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일은 아닙니다.’

은봉스님이 이 말을 받습니다.

‘그렇지, 그러면 거꾸로 서서 갔다는 선사는 없는가?’ 대중이 말이 없자, ‘나는 거꾸로 서서 가야겠다.’고 합니다.

순간 노인답지 않게 두 손으로 땅을 짚자마자 다리를 공중으로 번쩍 들고 거꾸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대중 스님들은 아연 실색하여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습니다.

화상은 거꾸로 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입고 있는 법복이 조금도 흘러내리거나 벗겨지지 않고 몸에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신도와 일반인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서 찬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장례식을 올리기 위하여 시신을 납관(納棺)하게 되었습니다. 시신은 여전히 거꾸로 선 자세 그대로 꼿꼿하여 아무리 밀고 당겨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당해 하였습니다. 이때 한 여승이 대중을 해치고 앞으로 나오더니 시신을 보고 꾸중을 하였습니다.

‘오라버니 스님, 이 무슨 짓입니까? 살아서도 기행(奇行)하더니 죽어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까?’ 그렇게 꿈쩍도 않고 거꾸로 서 있던 시신이 여동생이 손끝으로 슬쩍 밀자 힘없이 넘어졌습니다. 이 여동생 스님도 오래 전에 도를 깨친 선승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입니다. 이런 죽음 앞에 슬픔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도 미학(美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뿐입니다.


유명한 임제(臨濟)스님 당시에 보화(普化)존자라는 선성(禪聖)이 있었습니다. 보화존자는 세칭 허무승(虛無僧)의 비조(鼻祖)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네거리 한복판에서 요령을 흔들면서 색다른 소리를 외쳤습니다.

‘나에게 옷을 한 벌 보시하시오. 옷을 한 벌 보시하시오.’

사람들은 다투어 옷을 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자는 옷을 도로 주면서 ‘나에게는 이런 옷은 필요 없습니다.’ 하며 손을 내젓는 것이었습니다. 임제 선사가 이 말을 듣고 관을 짜서 드리니,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그 관을 짊어지고 춤을 추면서 번화한 거리에 나서서 선언하였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훌륭한 옷을 만들어 주셨으니 동문으로 가서 이것을 입고 열반에 들겠소이다.’ 그는 동문을 향해 요령을 흔들며 갔습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나서 물밀듯이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온 시선이 동문으로, 동문으로 몰렸습니다. 화상은 구름같이 모인 대중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으니 내일 남문에서 죽겠소.’ 군중은 하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남문에는 전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습니다. 대중들은 무슨 기이한 일이 일어날까 잔뜩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보화존자는 전날과 똑같은 행색을 차리고 나타나더니 오늘도 일기가 나빠서 내일 열반에 들겠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군중은 크게 실망하여 존자를 불신(不信)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몇사람만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채 서문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전날 같은 핑계를 대고 다음 날 북문에서 입적하겠다고 유유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하여 화를 내고 욕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네 번째로 선언을 한 북문으로 그의 말을 믿고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북문에 이르자 문 밖으로 나가서 평평한 바위 위에 관을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고 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마침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서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장안(長安)에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반석(般石)위에 놓인 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처음에 놓여있던 모양 그대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군중들은 관을 열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못을 하나하나 빼는 동안 군중들은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긴장하였습니다. 드디어 관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관속은 머리털 한 오라기 없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딸랑딸랑 귀에 익은 요령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습니다. 군중들은 깜짝 놀라서 일제히 머리를 들고 소리 나는 곳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한 줄기의 서광(瑞光)이 하늘 높이 찬란하게 뻗쳐 있고 요령소리만이 들여왔습니다.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요령소리가 들려오는 허공을 향하여 무수히 절을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신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이렇게 대단한 어른들은 생사문제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웰다잉’입니다.

예부터 선가(禪家)에서는 죽음을 옷을 갈아입는 데 비유했습니다. 옷은 오랫동안 입다가 낡거나 검어지면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몸뚱이도 늙거나 병들면 새 몸으로 마음대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옛 선사는 죽음을 오온(五蘊)의 껍데기를 벗어버린다, 가죽 푸대를 간다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기화(己和)스님은 ‘죽음은 부스럼 딱지를 없애는 것과 같고, 묶은 것을 풀어서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으며, 새가 조롱을 나온 것과 같으며, 말이 마구간에서 나온 것과 같다. 마음이 탁 트여 소요를 즐겨서 무애(無碍)의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자재하고 생사를 해탈하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고 선정을 익혀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수행을 잘하여 생사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고, 생사문제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명제이고 극복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제인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평생 수행해온 선승들은 입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죽음은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법신(法身)의 탄생이며, 열반의 기쁨’이라는 것을 겪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옛 도인들처럼 ‘열반은 최고의 행복이며,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여러분은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서 잘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고, 어떻게 죽는 것이 아름다운 죽음인 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인연으로 여러분의 생사관이 확립되어 진정으로 발심할 수 있고, 신앙심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상하다. 내 지금 금강(金剛)의 몸이지만 무상하여 변하는 것을 면치 못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속히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라. 이것이 곧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니라.”

불자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일체 중생의 성품 청정하여

본래부터 생겨남도 멸함도 가히 없는 것

그대가 만일 한 생각에 허물을 안다면

문득 윤회의 고통 끊고 극락에 태어나리라.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ㅋㅋ님의 댓글

ㅋㅋ 작성일

자리를 유지하는것은 그 자리네요.

이현재님의 댓글

이현재 작성일

고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Bad-being 하지 말며 Bed-dying 하면
Well-being 하고 Well-dying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간절하여 법을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Well-being 이요, Well-dying 인 것입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