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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참구법 제 2강 / 화두참구는 의정이 생명,오직 의정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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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12-07-18 13:13 조회4,6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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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疑情)을 일으켜라’

 

오늘도 날씨가 찬 데 오시느라고 대단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화두참구는 의정이 생명-

 오직 의정을 일으켜라.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치지 못한다. "

 



 

화두참구라는 것은 의정이 생명입니다.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되요. 화두 자체도 아주 좋은 법문이래요.
삼세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스님들의 안목이 들어나는 그 진수가 들어나는 법문중의 법문이 화두래요. 그러나 그 좋은 화두도 참선자에게는 오직 깨치는 데, 그 본 뜻이 있습니다.


깨칠려면 반드시 의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래서 의정이 크면 크게 깨칠 수가 있고 의정이 없으면 깨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라는 생각을 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둘째 시간으로 ‘의정을 일으켜라’ 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그런 분이 있었어요. 그런 분은 어떤 분이냐, 부처님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그런 분 이었어요. 부처님의 모습이나 말씀이나 여러 가지가 원체 훌륭하고 거룩하고 존경스러운 거래요. 그래서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그래서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운 그런 분들이 흔히 부처님을 비방하고 비난했다고 해요. 그렇게 부처님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부처님이 저만치 나타나면 입이 쑥 들어갔다는 거래요. 그러다가도 부처님이 가까이 오면 누구나 고개를 조아리고 존경심을 발로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은 누구도 비방하고 안 좋은 평을 할 수 없었어요.왜냐? 부처님의 모습이 너무나 거룩하고 훌륭하고 아주 존경스럽기 때문이라는 거래요.내면에 아무리 부처님 같은 도덕을 갖추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 보잘것없고 너무 못났으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참선하시는 분들은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 훌륭한 모습을 아주 존경스러운 모습을 늘 따르시려고 애쓰고 노력하셔야 합ㄴ다. 경전을 볼 때도 예사롭게 보지 말고 경전은 소설처럼 자상하게 일거일동까지 그렇게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여러 모습들이 부각돼요. 그런 모습을 따르려고 본받으려고 애쓰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겉모습부터 달라야 해요.


아! 거룩하구나, 훌륭하구나, 존경스럽구나하는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럴려면 여러분은 앉는 자세부터 제대로 앉으세요. 여법하고 단정하고 화두가 될 것처럼 그렇게 앉으시기 바랍니다.

 

앉는 자세는 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으시기 바랍니다. 척추뼈는 S자형 비슷하게 생겼어요. 척추를 너무 꼿꼿하게 세우지 말고요 그런가하면 허리가 양쪽으로 너무 기울이지 말고 앞으로 꾸부정하게도 말고요. 그런가하면 뒤로 넘어지지도 말게 하고 꼿꼿하게 여법하게 세우되 허리에 전혀 힘을 주지 마세요.

 

아주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유연하게 그렇게 앉습니다. 그래 앉으면서 어떤 부분도 힘을 주거나 억누르지 말아야 해요. 혹 앉는 동안은 아프더라도 능?참을 수 있어야 하고요. 한 시간 정도는 아프더라도 어디 병 안나요. 참는 것 자체도 좋은 공부고 수행이니까 한 시간 정도는 능히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진하시다가도 화두가 안 되는 분일수록 자주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서 단정하게 여법하게 그렇게 수행자답게 앉으시길 바랍니다.

 

참선할 때만 그렇게 앉느냐? 여러분 댁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앉는 연습을 하세요. 그러면 건강도 좋고요 보기도 좋고요.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선을 하더니 좀 다르구나 하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그런 정도로 몸 자세가 달라지도록 그런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앉는 자세뿐만 아니라 걸을 때에도 좀 다르셔야 해요.

 

의엿하고 늠름하고 당당한 그런 모습으로 걸으시길 바랍니다. 한 시간만 앉아도 아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시고 다듬어 가시길 바랍니다.

자세만 그렇게 하느냐. 마음까지도 달라야 되요. 마음은 어떻게 다르냐? 참선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해요. 마음을 아주 고요하게 하세요. 마음이 안정이 되요. 마음이 안정이 된 상태에서 화두를 해야 해요. 그래야. 의정이 잘 생겨요. 집중이 잘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을 시키려면 마음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놓으셔야 해요. 참선을 할 때는 일체를 비우고, 쉬고, 놓으셔야 합니다.

 



 

흔히들 화두가 안된다 의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분들 중에서 마음이 안정이 안 된 상태에서 하니까 잘 안 일어나는 것 같고 잘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분이 많습니다. 화두가 안 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수록 마음을 안정시켜서 여법하게 앉으시면 화두가 좀 수월하게, 쉽게 닿을 수가 있습니다. 신경 쓸 일이 있더라도 전혀 관심을 갖지 마세요. 그런가하면 먹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무심하고요.

 

일체, 당장 생각할 일이 있더라도 그것도 놓아버려요. 사랑하고 기뻐하고 미워하는 것도 없어야 하고 어떤 욕망이나 집착도 없어야 해요. 근심하고 걱정하는 그 헐떡거리는 그런 마음도 없어야 합니다.

외부로 일체를 쉬어야 해요. 그런가하면 내면적으로 만사를 놓아야 해요. 그래서 일체를 놓고 만사를 쉬면 마음은 편안하고 아주 고요해져요. 그런 상태에서 화두만 분명하게 아주 여법하게 그렇게 들어가셔야 합니다. 화두할 때만 그럴 것이 아니라 평시에도 늘 마음을 고요하게 하세요.

 

현대인들은 사실은 크고 복잡하지만 생각도 너무 복잡하게 해요. 복잡만하냐? 아주 다양해요. 머리가 터져 나가요. 어떤 외국에서 그린 외국사람이 그린 만화를 보니까 머리는 이만하고 몸뚱아리는 아주 가늘고요. 그런 모습의 만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요즘 사람은 너무 머리가 복잡해요. 그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기는 하는 데 오히려 불행한 거래요. 많이 배운 분일수록 많이 아는 분일수록 많이 쉴 줄도 알아야 해요. 쉴 때는 아주 철저히 쉬어야 해요. 그래서 평시에는 늘 마음이 고요하게 하세요. 고요하게 하면 맑아져요.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가하면 온갖 지혜가 막 출중해요. 즉 지혜가 번득거려요. 복잡하게 다단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아주 심각하게 아주 대단한 사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평시에는 늘 마음을 고요히 하세요. 고요하고 편안하면 살맛이 나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마음 편하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랄게 있느냐. 그런 말씀을 했어요. 그런 정도가 되면 기분을 느껴요. 그런 기분이 무엇이냐. 진정한 안락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 기분을 느낄 정도로...

 

생각할 때는 아주 깊게 하세요. 아주 심사숙고해. 막 빠져요. 그러나 마음을 놓으실 때는 늘 비워서 맑은 생각으로 기분 좋게 신나게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재미를 참으로 느껴요. 그래야 사는 재미를 제대로 느껴요.

 

보살님들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좀 꽁~ 하죠. 몇날 며칠 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런 분은 머리가 늘 복잡하고 괴로워. 그게 지옥이래요. 마음을 쉬면 아주 맑아요. 아주 기분이 좋아요. 어쨌든 늘 마음을 쉬어서 아주 맑은 상태로, 그렇게 해서 그런 아주 맑은 상태에서 화두를 드는 거래요.

 

화두란, 저번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는데. 참선자가 해결해야 될 문제라. 평생, 아니 깨칠 때까지 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화두입니다.

화두를 흔히 '공안(公案)'이라 합니다. '공부안독(公府案牘)'을 줄인 말인데, '공부'란 무엇이냐. 옛날 중국 사람들은 관공서를 '공부'라고 했답니다. '안독'이란 법령 같은 거예요. 관공서 법령은 아무나 고치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화두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공부를 잘하느냐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 점검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이 화두다 해서 공안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것은 ‘조사의 지위에 들어오는 문이다’해서 조사관(祖師關)이라고도 합니다. 그 화두는 옛날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법문이라. 그것은 언어와 종사가, 그 큰 스님들이 심지를 바르게 깨친 기연(奇緣)을 말해요. 그런가하면 학인을 인도하는 참선자에게 규범으로 삼게 하고 과제로 주는 것이 화두예요.

 

예를 들면 어떤 학인 스님이 어느 유명한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스님에게 묻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거래요. 부처란 아주 존경스럽고 성스러운 대단한 존재가 부처님이라. 그런 부처란 무엇이냐 물으니까. 그때가 여름이었다고 해요. 수초스님께서는 삼(麻)을 만지고 계시다가 삼을 들어 보이시면서 “삼서근, 마삼근(麻三斤)일세.”라고 했다는 거래요. 맞지가 않는 말이래요. 흔히 동문서답이다 그렇게도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법문이라.

 

어떤 학인스님이 유명한 조사스님에게 묻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 조사란 누구냐? 달마대사를 말해요. 서쪽 나라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그랬어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어요.

 

조주스님이 사셨던 그 절에 가보니까, 요새는 잣나무가 없어요. 측백나무가 많이 있습디다. 잣나무라고 한 것이 측백나무가 아니었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어쨌든 측백나무가 잣나무가 뜰 앞에 있었던 거래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 했더니, 뜰 앞의 잣나무라. 이것은 회괴망칙한 대답이래요. 그런데 그 대답이 보통 대답이 아니래요. 그 대답은 삼세 모든 부처님의 골수가 들어나는 아주 대단한 법문중의 법문이래요. 그런가하면 역대 조사의, 천하 선지식의 그 알맹이, 안목이 들어나는 법문중의 법문이 그런 말씀이래요.

 

그런 말씀은 이치나 생각으로서는 아무리 따져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래요. 그것은 말로서도 전할 수도 없고요. 문자로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 없고요. 오직 깨쳐야만 알 수가 있어요.

왜 그러냐? ‘언어도단 심행처멸’ (言語道斷 心行處滅), 말 길이 끊기고 마음자리가, 즉 생각이 끊긴 곳을 표현을 할 수 없고, 어떤 생각으로도, 어떤 분별심으로도, 어떤 망상으로도 알 수 가 없는 것이 화두입니다. 그것은 오직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대단한 말씀 중에 말씀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즉 공안은, 화두는, 간택을 해야 하는 데 공안이 흔히 천칠백공안이라 합니다. 그 많은 공안 중에서 1700가지 공안 중에서 어떻게 간택을 해야 하느냐. 그것은 선지식에게 간택을 받아야 합니다.

 

저번에 제가 첫째 날, 여기서 두가지(화두)를 제시해드리기도 했습니다만, 선지식한테서 즉, 여러분이 믿고 의지할만한, 평생 따르고 스승이 될 만한, 즉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만한 그런 선지식에게 화두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선지식은 학인을 자상하게 봐서, 저 분이 발심자나 비발심자냐? 근기가 어떠냐? 여러가지를 나름대로 보아서 적당한 화두를 주게 됩니다. 흔히 이런 법문이라던지, 아니면 책을 본다던가, 아니면 어떤 인연으로 해서 스스로 임의로 화두를 간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화두가 잘 될 때는 문제가 없는 데 화두가 잘 안될 때는 화두에 대한 이런저런 망상이나 이런저런 분별심을 붙어요.

이 화두로 깨칠수 있을까? 어떤 경우는 화두가 잘되는 데도 이런저런 분별심을 붙여서 화두가 결국은 안되게 합니다. 화두는 완전히 믿어야 해요.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해요. 일체의 사량심과 분별심을 안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화두공부가 잘 되게 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화두참선은 어떻게 하느냐?
‘화두 참선한다’ ‘화두공부한다’ 여러가지 표현을 하는 데 그 말은 무슨말이냐? 화두에 의정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화두에 의정을 일으켜서 화두를 지어간다는 거예요. 그 화두 참구를, 어떤 분은 송하는 줄 알고 송하는 것은 외운다는 말이예요. 화두를 외우는 분이 있어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염불하듯이 외우는 분이 있어요. 화두는 외우는 것이 아니예요. 어떤 분은 앉아서 안되니까, 서서도 하고 그래도 안되니까 막 다니면서 외웠다는 분도 있어요.

 

그래도 잘 안되니까 목탁을 잡고 저 뒷산에 올라가서 산천에 다니면서 고함을 쳤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화두는 외워서는 안되요. 화두참구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해요.

 

또 어떤 참선자는 ‘화두는 생각하는 것’인줄 알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요. 화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없는 것이래요. 그래서 화두참구할 때는 생각한다던가 분별심을 낸다는가 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되고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안다는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화두를 관한다. 볼 관(觀)자. '본다' 하는 분이 있어요. '무無'자 화두 드는 분들. 이뭣고 하는 분 중에서 간혹 그런 분이 있습니다. 없을 무 자를 큼직하게 써서 벽에 붙인다던가 방바닥에 붙여놓고 보는 거래요. 집중해서 나름대로 본다고 보는 데, 집중해서 아무리 봐도 진정한 의정은 안 일어나요.

 

요즘은 위빠사나 하시는 분들이 그런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해요. 그것도 나름대로 집중은 되요. 그러나 절대 깊게는 못 들어가요. 화두는 그렇게 관(觀)해서도 안되요. 그냥 지켜보아서도 안되요.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화두는 그러면 어떻게 드느냐. ‘염불하는 것이 뭣고’ 그것은 그대로 들면 되요.

 

‘염불하는 것이 뭣고’ 하는 분도 있고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 하는 분도 있어요. ‘염불하는 것이 뭣고?’ 그렇게 드는 것이 좋습니다. 염불하는 것이 이뭣고와 같이 앞에 무엇을 붙여서 할 때는 가급적이면 짧은 것을 붙여요. 가급적이면 짧은 것을 붙이는 것이 좋아요.

 

앞에 무슨 언구(言句)를 안붙여도 즉 염불을 하는 것이 뭣고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시고, 이뭣고 하는 분은,  “이~” 하면서 “이~” 하는 마음속으로 "그 놈이 뭣고~"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십시오.

 



 

“이 뭣고” 하면 '화(話)'이고. “이 뭣고” 하기 이전 “이뭣고” 하는 그놈이 '두(頭)'래요. '두'가 무엇인지 참구하는 것이 '화두'예요. 그것을 잘하셔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만약 그냥 이뭣고 할 경우는 “이뭣고~” “고”를 길게 빼요. 그러면 의정이 더 크게 더 깊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이뭣고 하는 참선자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보는대로, 듣는대로 이뭣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되요.

 

그런가 하면 모든 경계와 소리를 쫓아가면서 이뭣고! 이뭣고! 하는 분이 있어요. 느낌이 있는 곳을 참아서 그렇게 해서도 안돼요. 그런가하면 아주 소소영영하게 이뭣고 하는 그런 경우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도 안돼요. 오직 이뭣고 꾸준히 해요. 화두를 여러 날 하다보면 잘 안되는 것 같아요. 그렇더라도 자기가 참구하는 그런 공안을 참구해야 참으로 진의가 돈발하지, 그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보는대로 듣는대로 그렇게 하면 진의(眞疑)가 돈발(頓發)하지 않는다. 이것을 확실하게 아시길 바랍니다.

 

이 마삼근 화두도 “부처란 무엇입니까?” 물은 거래요. 그러니까 동산수초스님께서 ‘마삼근이니라’했어요. 부처라 물었는데, 삼이 세근이라 했어요. 참구하는 방법은 어째서, 또는 왜, 삼서근이라고 했을까? 삼서근이라고 한 이유, 그 이유, 그 까닭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참구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를 들 때는 수

초스님이 계실 때 그 묻는 것을 연상해요. “부처란 무엇입니까. 삼서근이니라. 어째서, 왜! 삼서근이라 했을까?” 그렇게 의정을 일으키면 의정이 상당히 납니다. 의정이 나면 그대로 의정을 지속해요. 의정이 그치자마자 바로 또 화두를 들어요.

 

두 번째는 어째서 왜만 붙여서 어째서 왜 삼서근이라고 했을까? 앞의 말씀은 연상하지 말고 바로 어째서? 왜?만 해서 그렇게 해서 의정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두 번이나 세 번쯤 일으키면 의정이 또 좀 약해져요. 그러면 처음부터. “무엇이 부처입니까. 부처란 무엇입니까. 삼서근이라. 어째서, 왜! 삼서근이라 했을까” 그렇게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무(無)’자 화두. 화두 중에 가장 많이 하는 화두를 흔히 무자 화두라 합니다. 역사상 선지식이 가장 많이 배출된 화두도 무자라고 해요. 그래서 화두 중에 화두다. 화두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화두가 바로 ‘무’자 화두라 해요. 그래서 대혜스님 당시에는 어떤 선원에서는 전 대중이 참구했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화두하면 무자, 무자하면 화두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지던 화두가 바로 무자 화두예요.

 

그 무자 화두는 어떻게 나왔느냐. 고불(古佛)이라고, 부처님의 후신이라고 까지 불리워졌던 조주스님께서 80세까지 걸망을 지고 이 절 저 절 인연 따라 그렇게 사셨다는 거래요. 80세에 그 조주 땅 관원에 들어가셔서 절을 짓고 납자를 제접(提接)합니다 구십 몇 세 되셨을 때인데 어떤 겨울날, 난방시설이 잘 안 되었던가 봐요. 노스님이 추워서 따스한 양지쪽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던 거래요. 절에서 개를 먹였던가 봐요. 개한마리가 와서 노스님 주변을 다니면서 재롱을 떠는 거래요. 노스님이 앉아 계시니까, 젊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문득 묻습니다.

 

“저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 라고 묻는 거래요.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 모든 중생이 땅속의 지렁이까지도 불성이 있다, 부처될 성품이 있다 하셨고 보잘 것 없는 미물까지도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는 고등동물에 들어가잖아요. 개란 것은 불성이 있는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조주스님께서는 “없다(無)” 라고 했어요.

 

없다는 데 큰 뜻이 있어요. 그래서 참구방법은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당시를 연상을 해요 “무(無)라 ~” 부처님께서도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께서는 어째서, 왜! 무(無)라고 했을까. 그렇게 참구합니다. 그렇게 앞의 것을 붙여서 어째서 왜 ‘무’라고 했을까. 그렇게 참구를 해요. 그렇게 참구하면 의정이 납니다.

 

그러면 의정을 지속했다가 끊어지면 바로, 의심이 약해지자마자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의정과 의정의 간격이 없어야 되요. 두 번째는 앞의 것은 하지 마시고 어째서 왜 ‘무’라 했을까, 세 번째도 그렇게 하고 한 네 번째쯤 그렇게 하면 의정이 약해져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참구를 합니다.

 

그렇게 참구를 하되 의정은 ‘무’에서 일으켜야 해요. 없다는 데서. 그 ‘무’라고 한 뜻. 왜 ‘무’라고 했을까. ‘무’라고 한 뜻은 말이나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라고 하는 그 말은 단순한 ‘무’인지. 그렇지 않으면 ‘유’에 대한 상대적인 ‘무’인지. 아니면 허무의 ‘무’인지. 아니면 진무의 ‘무’인지. 그러나 그런 말이나 글에 있는 것이 아니래요. ‘무’라고 한 이유, 그 원인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화두는 그 이외에도 정전백수자(뜰 앞의 잣나무)나, 간시궐(乾屎 木+厥, 마른 똥 막대기) 등 여러 1,700가지 공안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전백수자는 뜰 앞의 잣나무 왜, 어째서 왜 뜰 앞의 잣나무라 했을까. 뜰 앞의 잣나무에서 의정을 일으켜야 됩니다. 어째서 왜 마른 똥 막대기라 했을까. 간시궐에서 의정을 일으켜야 해요. 화두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오직,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화두 자체가 생명이래요. 화두자체가 심오한 법문이고 아주 대단한 법문이래요. 깨치면 바로 부처경계래요. 그러나 그 화두도 깨치는 데 본 뜻이 있어요. 의정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래요. 의정이 없는 참구는 참구가 아니래요. 의정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는 화두공부가 아니래요. 화두는 의정을 일으키는 데 뜻이 있다.

 

오직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화두참구는 바르게 하고요. 바르게 한다는 것은 의정을 일으키면서 바르게 한다는 거래요. 조금도 틀림이 없어서 화두참구에는 일체의 사량심과 분별심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화두참구법 제2강-화두참구는 의정이 생명,오직 의정뿐!(2007년 2월 법문) (무여스님과 함께하는 화두공부) |작성자 서암합장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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