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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와 용맹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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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산 스님 (영축선원 선원장… 작성일05-12-28 20:15 조회3,7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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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장마가 겹치는 지금, 전국의 산중에서 2,000여 분의 납자들이 신발소리, 기침소리 하나에도 신경 써가며 공부에 전념하는 거룩한 하안거 기간이다. 결제(結制), 곧 안거(安居)란 인도불교의 오랜 전통이었는데, 매년 여름 우기(雨期)에 더위와 자연재해를 피하면서 한 곳에 정착하여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한 좋은 제도였다. 북방불교권인 중국이나 한국에 와서는 겨울안거를 보태어 매년 두 번 행하는 것으로 정착되어 왔다. 결제는 본래 중국 선종사찰에서 주로 지켜오던 빛나는 전통인데, 오늘날에는 간경결제(看經結制)다 화엄경 논강결제(論講結制)다 하여 강원이나 일반사찰에서도 결제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필자가 결제문화의 혜택을 처음 받은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그 시절 해인강원의 경반(經班)학인이었는데, 결제 중에 해인총림에서는 반산림(半山林)이 되는 6월 초하루부터 1주일간 모든 대중이 학인이나 종무소 소임자까지 모두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경반학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때 출가하고 처음으로 준비 없이 용맹정진에 겁 없이 뛰어든 것이다. 하여튼 첫 용맹정진은 시작하자마자 1주일 내내 아픈 다리와 또 잠과 씨름하면서 보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기억은 다리가 좀 덜 아프면 잠이 쏟아지고, 잠이 안 올 때는 다리가 아파 화두공부는 어림도 없던 기억뿐이다.


어렵게 첫 정진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해보자. 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오후, 나른하게 관음전 지대방에서 몇몇 학인이 꿀맛 같은 단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서 홀연히 일진광풍이 부는가 싶더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가야산 호랑이’가 내려왔다는 둥 하더니 하나 둘 흩어져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그 즈음 연탄불에 한약을 달여 먹고 있었는데, 잠이 설핏 들어 꿈속에 빠져 있었다. 잠자기 전에 호랑이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호랑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에 갑자기 차가운 냉기가 훅 끼쳐 오더니, “야 이놈 봐라! 어른이 들어왔는데도 그냥 낮잠을 자고 있어?!” 다짜고짜로 호랑이 발톱에 채인 나는 얼떨떨한 채로 저만치 구석에 처박히고, 호랑이 꿈은 이미 혼비백산되어 버렸다.


눈을 부시시 떠 보니 방장스님(입적하신 성철性徹스님)의 서슬 퍼런 호령소리가 들린다. “수행한다는 놈이 편안하게 왠 낮잠이냐? 선방에서는 지금 생사를 걸고 화두공부에 여념이 없는데, 이놈! 법당에 올라가서 3천배 하거라! 그것도 싫으면 보따리를 싸든지……” 도반들이 한 쪽에서는 킥킥거리고 몇몇은 고하기를 “그 스님은 몸이 아파서 약 먹는 중입니다. 착실한 스님인데 한 번만 요옹…서어…….” “시끄럽다! 너그들도 3천배 하고 싶나? 조금 전 이 방에서 낮잠 자다가 고무신 한 짝만 퍼뜩 신고 도망가던 놈들……!” “알겠습니다. 참회하겠습니다.”


그날 그 와중에 연탄불에 올려놓았던 약탕관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백련암에 계시다가 불시(不時)에 강원, 주로 경반을 순시하고 다니시던 자비하신 전 종정 성철큰스님. 한 대 얻어맞은 행복한 그 기억이 지금은 아련한 옛 추억이 되었으니, 삼가 감사의 예를 올린다.




그 해 겨울안거 때의 일이다. 학인이었지만, 통도사로 출가하자마자 대선지식 경봉(鏡峰) 선사를 시봉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용맹정진에는 빠지고 싶지 않았다. 겨울에는 선열당(禪悅堂)에 온 대중이 모여 앉아 용맹정진을 했다. 해인사는 예로부터 꼭 용맹정진 기간에 눈이 내려 가야산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하곤 한다. 어떤 때는 용맹정진으로 잠을 안 자고 공부하던 수좌들이 눈 덮인 가야산이 푸근한 이불처럼 느껴져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는 그 눈. 밤새 내린 그 눈 무게에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 소리 ‘뚝 뚜둑……쿠웅!’, 얼마 있다가 새벽을 깨우는 수좌 스님의 장군죽비 소리 ‘탁 타닥 타다닥……!’. 이 수좌 스님이 연전에 입적하신 전 종정 혜암 스님이셨다. 여름에는 다리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겨울에는 다리 아픈 것은 일체 없고 공부가 그래도 순일하게 된 터이라 일주일 더 정진했으면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해 용맹정진 도중에 선열당을 지키시던 수좌의 표상, 현우(玄雨) 노장님이 입적하셨다. 납월 팔일 새벽 가늘게 눈발은 내리는데 일주일 정진을 마친 눈 푸른 납자들이 현우 선사의 법구(法軀)를 상여에 메고 갔다. 진주장 여관 뒷길로 만장(輓章)의 물결 넘실거렸다. 연화대에서 다비(茶毘)를 모셨는데 내가 경험한 가장 성스럽고 기억에 남는 다비식이었다.




옛 이야기를 하다보니 옆길로 빠진 듯하다. 결제는 이처럼 느슨하던 우리 수행인의 마음을 다잡아 공부에 몰입하는 좋은 시간들이다. 하지만 결제를 마지못해 한다거나 어김없이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일상화해 버린다면 그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고인들은 천결제 만결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정한 결제는 공부하려고 산문에 발을 들여놓는 그 때이고, 진정한 해제(解制)는 고인네들의 화두(話頭)를 타파하여 칠통(漆桶)을 부숴 버리고 대자유인이 되는 그 때가 비로소 해제라고 하셨다. 공부하는 수좌가 껌껌한 무명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이 산 저 산 쫓아다니며 선방 문고리만 잡는다거나, 선방 문턱을 수없이 드나든 안거증 숫자만 세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공부하는 일등수좌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입학이 결제요 졸업이 해제이며, 새로 결혼하는 신랑각시는 결혼식이 결제이고 백년해로 후 손자손녀 절 받으며 칠순 잔치하는 날이 해제일 것이다. 또 집안에 고3 학생이 있는 집은 일년 내내 산중에서 결제하는 스님들처럼 1년을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정진해야만 고3 학생이 무탈하게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으리라.


또한 도시에서 포교하는 필자는 법회를 시작한 첫날이 결제요, 나와 함께 불교 공부하던 불자들이 바라던 바 소원을 성취하고, 불교를 남 앞에서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때가 바로 해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는 산중에서 열심히 참선수행 잘 하는 것 못지않게 시중에서 불자들과 함께 희로애락하면서 불법을 전하는 것도 뜻있는 수행임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산중에서 치열하게 정진하시는 선배 도반 스님들께 당부드린다. 요 몇 년 사이에 산중에서 많은 어른 스님들이 가셨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는 새로운, 새 시대를 이끌어갈 선지식 스님들이 많이 나오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지난 시절 큰스님들께 받은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느슨해진 나의 의식을 다잡으며 항상 결제 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작정이다. 벌써 저만치 동녘은 밝아오는데, 조금 있으면 산중에서는 온 대중이 예불하려고 법당에 모일 시간이다. 불법에 어찌 고금이 있겠는가?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요, 환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하지 않던가! ‘천겁의 세월 지나도 옛날이 따로 없고 만년을 이어가더라도 항상 현재로 여기며 살라.’는 뜻이리라. 오직 수행하는 이들의 발심이 얼마나 견고한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어디서 낭랑한 목탁소리, 새벽을 여는 소리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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