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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리 만산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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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11-21 15:29 조회3,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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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양리 만산고택(晩山古宅)

 

버제이 진주 강씨 문중은 닭실의 안동 권문과 더불어 봉화에서 쌍벽을 이루는 토반(土班)이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음지마을과 양지마을에 나누어 사는데 여기에 얽힌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종가 체험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서

춘양면 의양리에 있는 만산고택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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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의 유래

 

춘양이라는 지명은 만석봉 아래 들판이 넓으면서도 양지바르기 때문에 항상 봄볕처럼 따뜻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춘양시내에 있는 만산고택은 조선후기의 문신 만산 강용(1846~1934)선생이 고종 15년 (1878)에 지은 집이다.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셨다. 행랑채는 솟을 대문을 두고 양쪽에 11칸을 지은 특이한 구조이고, 큰 마당의 바로 앞에는 사랑채가, 왼쪽으로는 대추나무 한그루와 서실이, 오른쪽에는 별채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양반가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만산고택은 구한말 유명했던 원세게와 이홍장의 글이 남아있다. 서실에는 영친왕이 7세 때 썼다는 한묵청련(翰墨淸緣) 글씨가 있다. 특히 사랑채 전면 현판에는 대원군의 친필 탁본 ‘만산(晩山)’이란 당호와 해강 김규진 선생의 백석산방(白石山防)이 걸려있다. 별채인 칠류헌은 한옥 건축에는 최고의 목재라는 춘양목으로 지어서인지 100년의 세월이 무색하도록 마루는 정교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이 전혀 없다.

서실에는 밤낮으로 낭낭한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봉화지역에 유독 인재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배출된 이유가 아닐까.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은 손님을 모시기 위해 지었는데 문객(文客)들이 묵으면서 독서와 시문(詩文)을 짓고 도의(道義)를 강론하는 용도로 쓰여 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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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공과 아들인 의재공의 행장

만산공은 이조참의 사간원 대사간과 북청부사(北靑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선고(先考) 백초공 하규(白樵公. 夏奎. 1813~1883, 헌종 12년 1846 별시 문과 을과 급제)의 청렴과 근검절약을 본받았다. 또한 아들인 의재공, 필과 함께 치산(治産)에 힘을 기울여 태백산중 춘양골 80여리에 논밭을 가진 만석갑부의 부(富)를 이뤄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공(公)은 자기 몸에 패물 같은 것을 붙이지 않았다. 다만 어려운 이가 있으면 응당 주저 없이 베풀곤 했다. 날씨가 추워 종들이 사는 집 창호지가 찢어진 것을 손수 종이를 가져다 발라주었다. 뜰을 거닐 때에도 벌레나 개미도 밟지 못했다고 하니 인간적이며 따스한 그 품성을 짐작케 한다.

만산공께서는 을사조약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계성산 수풀이 우거진 곳 태고동 (太古同)에 1910년(경술년) 작은 정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망미대(望美臺)에서 나라 잃은 국운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아들인 의재공은(1878~1942) 학식과 덕망이 높았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해 추앙을 받았다. 을사조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25년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주도한 (유림단사건) 독립자금 모금 시 거금 3천원을 내놓았다.

훗날 이 사실이 일제(日帝)에 의해 밝혀져 (군자금 각출,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 대구 경찰서에 구금되는 옥고를 치루었다. 정부는 이를 인정하여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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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 고택에서는 향토 사학자 강 백기 선생께서 학업을 마친 뒤 머물고 있다. 선생께서는 보학(주 : 집안의 유래를 밝히는 족보학)에 밝아 영남지역 유림역사를 꿰고 있다.

고택에서 나누는 차담과 봉화지역 내력이 어우러진다면 또 다른 세계에 눈 뜨게 될 것 같다. 중앙 역사와 또다른 맛을 간직한 살아있는 사람 냄새나는 향토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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