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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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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11-15 13:43 조회3,3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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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수행發心修行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를 닦는 일은 가장 처음의 일이며 가장 나중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을 나의 의식 중심에 세웠느냐에 따라 수행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으며 중생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익은 가을, 의상스님의 말씀이 활구로 다가옵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그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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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구하는 마음

상현스님_범어사 승가대학 학감

『법화경·서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부처님의 미간에서 놓은 빛, 부처님의 지혜에 비추어진 세계에 많은 중생이 보인다. 그 사람들은 탐·진·치에 헤매면서도 동시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사람이고, 탑을 세우는 사람이고, 보시를 하는 사람이다. 어떤 형태로든 발심하여 불도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도 부처님의 지혜를 가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행이불도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전부 발심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발보리심이란 뜻이다.『기신론』에서 말한다. “도에 이르는 과정을 조직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도는 모든 수행자가 발심하고 수행해서 그곳에 도달하는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대개 발심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로 신심이 완성하는 발심, 두 번째로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을 함유하는 발심, 세 번째는 깨달음으로서의 발심이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으로 발심해도 관계 없다.

우리들은 세계의 모든 것이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무상의 진리·법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현재의 모습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 속에서 “저 사람은 몇 번 말해도 알아 듣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그 사람 자신이“남의 의견에도 귀를 좀 기울여 보자”라고 하는 마음이 되면 바로 그 순간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지금은 번뇌에 휘둘려 범부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반드시 발심(가장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해서 불도를 수행하면서 걸어갈 것이라고 믿으면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곳에는 불법에 의하여 자기의 견해를 전환시켜가는 중대함이 있고, 인생을 보다 풍부하게 자유롭게 무한하게 변화시켜가는 커다란 열쇠가 있다. 매일 서로 만나는 모든 사람, 각각의 사건에 대하여 부처님의 눈으로 보도록 발심하여 한 번밖에 없는 고마운 인생을 밝게 수행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대일경』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以菩提心爲因(이보리심위인) / 보리심(발심)을 씨앗으로 삼고以大悲爲根本(이대비위근본) / 대비심을 뿌리내리고以方便爲究竟(이방편위구경) / 방편으로 구극을 삼는다 여기에서 보리심(發心)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본래 다 가지고 있는‘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다. 곧 부처님의 마음, 불성이다. 그것이 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이란 종자(씨앗)이다. 그러니까 보리심(發心)이라고 하는 종자가 있다. 그곳에서 대비라고 하는 뿌리(根)를 내리는 것이다. 대비(大悲)라고 하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다. 그 자비의 마음이 뿌리가 된다.

자비의 자(慈)는 우정이라고 하는 의미이고, 비(悲)는 신음이라고 하는 의미다. 어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에게, 우정을 가지고 그 곁에서 자신도 또한 우정의 신음소리를 발하는 것이 자비가 되는 것이다.

자비는 애정과는 다르다. 애정이란 좋은 것은 사랑하지만 나쁜 것은 증오한다. 자신의 잣대로 재어서 사랑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잣대를 버리는 것이 자비다. 같이 괴로워하고, 같이 울고, 같이 고민하는, 바로 이‘같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보리심이라고 하는 씨앗은 대비라고 하는 뿌리를 내리게 하고 드디어 발아하여 성장해 간다. 그것이 구극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다. 방편이란 일반적으로는 ‘거짓말도 방편’이라고 사용되고 있는데, 본래는 불교용어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의<우바야>의 번역으로, ‘가까이 간다’, ‘접근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목표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법화경·방편품』에 보면 ‘언사유연 열가중심(言辭柔悅可衆心)’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말이 부드러워서 상대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의미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사용 여하에 따라서 슬프게 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흉기도 된다.‘구시화문(口是禍門, 즉 입은 재앙의 문)’이라고 한다. 경솔한 말 한마디로 일생을 망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다. 말로 인하여 싸움이 되는 일도 있다. 그 원인은 사려분별 없는 경솔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말은 흉기가 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도움을주고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생각이나 환경의 차이에서 때로는 충돌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상대를 생각하고 편안한 말로 접하는가 이다. 부드러운 말로 응대하면 상대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피곤하고 격한 말로 대처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시고 있다.『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무재의 칠시(無財의 七施, 곧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설하시어, 우리들을 부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신다. 무재의 칠시란, 돈이 없어도 마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시행을 말한다. 그 일곱 가지중에 ‘언사시(言辭施)’라고 하여 말로 하는 보시가 있다. 상대가 기뻐하는 마음이 되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로 접하는 것이다. 말에는 온도가 있다. 차갑고 냉정한 말 속에는 찬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상대가 냉정한 말을 할 때는 찬 기운을 느끼게 되어 상대에게 더 차가운 말로 응대하는 것이 우리들 중생이다. 그러면 상대는 다시 곱이나 되는 더 차가운 말로 공격을 해오게 된다.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상대의 표면의 말에 걸리지 않고 그 마음 속에 있는 마음을 알아서, 그 마음에 맞는 따뜻한 온도의 말로 응대하면 보시가 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만 가지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상생활 속의 ‘발심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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