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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기행방

한국의 5대적멸보궁 : 정암사(淨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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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련화 작성일12-07-17 13:15 조회3,82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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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근년에 완공된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오른쪽에는 고색(古色)의 적멸보궁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마노탑을 등에 지고 있다. 중간 도량가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이 중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의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전통사찰총서 1-강원도 Ⅰ-(사찰문화연구원, 1992)

댓글목록

영영님의 댓글

영영 작성일

오래전에 참배한 정암사를 지난봄에야 다시 갔었답니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니 긴 세월 속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였답니다.
그날의 반가움이 되살아 나는군요.
정말 좋은 기획을 하고 계신답니다.
앞으로 천천히 순례를 해 볼까 한답니다.^^

신문을 읽다보니 조선 시대에는 여자들은 물론 그러하지만
선비나 양반들조차도 여행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녀간 곳의 그림들을 구하여 걸어두고 감상하거나
기행문등을 읽을 하면서 아쉬움을 달래었다고 하더군요.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아예 집안에다가 요즘 말로 표현한자면
인공산인데 그 시대 말로는 석가산(石假山)이라고 한다는군요.
이 석가산을 꾸며놓고 감상하였다고 하네요.
글쎄요. 조선판 미니어처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좋은 글, 그림 감사드린답니다.^^

홍련화님의 댓글

홍련화 작성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법융님의 댓글

법융 작성일

못가본 정암사를  홍련화보살님의 안내를 받아서
잘 다녀온것 같아서 기쁩니다
좋은글 곁들여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