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난 집에서 나오너라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15-03-14 13:53 조회4,634회 댓글0건본문
존경하는 신남신녀 여러분!
이번 호의 법문은‘ 불난 집에서 나오너라’는 제목으로『 묘법연화경』가운데 있는‘ 화택火宅’비유의 법문을 하겠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법문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형식을 갖추겠습니다.법문이 꽤 길므로 요약하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한 마을에 장자長者가 살았습니다. 나이는 많으나 대단한부자였습니다. 그의 집은 매우 크고 넓었으나 대문은 하나뿐이었고 식구는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그 집은 매우 낡아서 벽과 담은 무너지고, 기둥뿌리는 썩었으며, 대들보는 기울어져 위태롭게 보였습니다.어느 날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 한창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 안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어린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사면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비록 이 불난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여러 아이들은 이불타는 집에서 장난하고 노느라고,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놀라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머지않아 불이 곧 몸에 닿아서 그 고통을 한없이 받으련만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나오려는 생각도 못하는구나.’
또 장자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 집의 문은 단 하나 뿐이므로 매우 좁아서 소견 없고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 것들한테 이 집이 한창 불에 타고 있어 무섭다는 말을 일러주고, 지금 빨리 나오지 아니하면 불에 타서 죽는다고 하리라. ’ 이런 생각을 한 장자는 그 여러 자식들한테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애가 타서 좋은 말로 타이르고 달랬습니다. 그러나그 어린 자식들은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서 믿지도 아니하고 놀라지도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여, 나오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불이 어떤 것이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동서로 내달리고 놀면서 아버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또 장자는 생각하기를‘ 이 집은 벌써 맹렬한 불길에 쌓여 있으니 저자식들이 지금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불에 타게 되리라. 내 이제 모든 방편과 수단으로 자식들로 하여금 이 화재를 면하게 하리라’ 그 아버지는 여러 자식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하는 구하기 어려운 장난감이 있는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들이 대문 밖에 있으니, 불타는 집에서 나와서 가지거라. 너희들이 달라는 대로주겠노라.”
자식들은 아버지가 말하는 장난감이 마음에 흠뻑 들어 서로 밀치면서 기뻐하며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그때 장자는 여러 아들에게 평등하게 큰 흰 소 수레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수레는 크고 높아 여러 가지 보배들로 장식되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면으로 풍경을 달았고 그 위에는 휘장을 쳤는데, 모두 보배와 영락으로 꾸며졌으며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 화택’의 비유는 유명한 법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단한 찬사를받은 예화입니다. 비유 가운데 장자는 부처님을 일컫고, 아들들은 중생을 말합니다.이 세상 사람들은 불난 집의 아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난 집에장난하고 노느라고, 불이 났는지 어디가 탔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불이 몸에 닿아서 그 고통을 한없이 받으련만,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탈출하려는 마음도 못내니 얼마나 미련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이 비유를 통해서 인생을 바로 보고, 바로 느낄 줄 알아야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난 집과 같다고 하는 현실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아야 하고, 둘째, 불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의 의미가 무엇인가? 셋째는 이 불난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무엇인가? 넷째는 장자가 어린 아들들에게 약속한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난 집에 비유하셨으며, 여기서 말하는 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삼계三界라고 합니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는데, 욕망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삼계는 온갖욕망이 들끓어서 아주 괴로운 세계입니다. 그 욕망으로 갖가지 번뇌를 일으켜서 중생을 괴롭힘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음을 비유하였습니다. 번뇌와 괴로움이 그칠 사이가 없는 인간세계는 마치 불이 훨훨타오른 집과 같아서 괴로움이 가득합니다.
초기 경전인『 마하아밧가』에 보면,‘ 타오르는 법문’ 또는‘ 불타는 법
어’라고 하며,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불타고 있다. 눈과 그 대상과의 접촉도 불타고 있다. 눈이접촉한 데서 생기는 감수感受, 즉 즐겁고, 괴롭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것들도 불타고 있다. 왜 불타고 있는 것일까? 탐욕의 불, 노여움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귀도 귀로 듣는 소리도, 코도코로 맡는 냄새도, 혀도 혀로 맛보는 맛도, 몸도 몸으로 느끼는 감각도,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모두가 한결같이 타오르고 있다.”
이 초기 경전의 말씀을 새겨보면, 불이란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삼독심이란 탐욕貪欲과 진애瞋厓, 우치愚痴의 세 가지 번뇌를 가진 마음을 말합니다. 삼독은 삼계의 모든 번뇌를 포함하며,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번뇌로서,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룡毒龍과 같다고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은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접촉을 하거나 오경五境을 대할 때 분수에 넘치게 만족할 줄 모르고 탐욕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치심은 삼라만상의 이치와 도리에 어두워연기의 도리나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마음이고, 진심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은 삼독심의 갈애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 충만한마음가짐을 불로 비유했습니다.중생들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먹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망념妄念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마음속의 불을 꺼버리지 못하기 때문에온갖 망념을 일으키고, 이 망념이 악업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두려운 업장을 짊어지고 삼도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범부들은 자신이 불타는 집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불이 무엇인지, 집이 무엇인지 모르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장자의 어리석은 아들처럼, 우리 중생들도 자기 자신이 불씨를 안고 연기를 내뿜으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까닭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중생들이 바르게 인식토록 하고, 그런 연후에 그 불난 집에서 구출해 내기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자가“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어서 나와서 타고 놀아라.”하고 외칩니다.이 세가지 수레는 성문, 연각, 보살을 상징합니다.
성문승聲聞乘이란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은근하게 정진하여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닫고, 아라한과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연각승緣覺乘이란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자연의 지혜를 구하며, 고요한 데를 즐기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인연의 이치를 깨닫고 벽지불과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승菩薩乘은 육바라밀의 행을 닦아서 최고의 진리인 무상보리를 깨달아 중생교화를 염원하는 대승보살을 말합니다. 이를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편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불난 집은 낡고 큰 집이라 했는데, 그 집에는 오직 문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 큰 집에 문이 하나밖에 없을까요?
불난 집이란 삼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난 집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삼계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삼계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만 삼계의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여기는 하나의 문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여부처가 되는 하나의 문밖에 다른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평소에 바라던 세 가지 수레 대신에,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하얀 소가 끄는 화려한 큰 수레를 준비하여 두었던 것입니다.장자는 아이들에게 흰 소가 끄는 화려한 장엄을 한 수레를 선사하였는데, 아이들은 아무도 그들이 바라는 수레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바라던 것보다 더 훌륭한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아이들에게 선물한 흰 소 수레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토록 갈구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위없는 바르고 고른깨달음, 즉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삼승三乘을 말씀하셨다가 정작 안내하기는 최상승의 깨달음으로 인도하셨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깨달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깨달음의 길을 걸어서 진정한 자기를 찾는 길입니다. 앞에서 그토록 고구정녕苦口丁寧하고 노파심절老婆心絶하게 말씀하신 삼계화택의 고뇌에서 벗어나 자기의 근본 성품을 보아 참 자기를 바로 느껴야 합니다. 마치 불이 이글이글 훨훨 타는 것과 같은 망념을 확실히 벗어나 순수한 자기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자기를 찾고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놓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을 가지지 않고, 일체마음을 일으키지 않는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쉬고 비우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했습니다.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쉬지 못하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왜 쉬지 못하는가. 요즘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음알이로 자라고, 알음알이로 중무장하고 알음알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큰재산이 되고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식 때문에괴롭고 어려워서 보통 인간으로서 한계를 넘지 못하니, 괴롭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쉬지 못하니 괴롭고 한스러우나, 불교는 좋은 수행법이 있으니 노력하기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수행법이 염불법이고 참선법입니다. 불자든 비불자든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느끼고, 참으로 행복하려면 불교수행을 해야 합니다.
염불하시는 분은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 보시고, 화두참선 하시는사람은 선정禪定에는 꼭 들어보십시오. 염불이나 참선을 하시다가 보면, 몇 시간이 지났는지, 하는 곳이 절인지 집인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정도까지만 되면 수행하시는 기분과 보람을 크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상이 없다’,‘ 오직 할 일은 이것뿐이다.’라는 확신을하게 되고, 불교를 만나서 불교신도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께 감사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가 될 것입니다.
봐도 보는 바 없으면 분별이 없고
들어도 듣는 바 없으면 시비가 끊어지도다.
분별과 시비를 몽땅 쉬어버리고
참 자기 바로 보아 스스로 귀의할진저.
----- 가을호(2014) 큰 스님 청정법어 입니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이번 호의 법문은‘ 불난 집에서 나오너라’는 제목으로『 묘법연화경』가운데 있는‘ 화택火宅’비유의 법문을 하겠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법문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형식을 갖추겠습니다.법문이 꽤 길므로 요약하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한 마을에 장자長者가 살았습니다. 나이는 많으나 대단한부자였습니다. 그의 집은 매우 크고 넓었으나 대문은 하나뿐이었고 식구는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그 집은 매우 낡아서 벽과 담은 무너지고, 기둥뿌리는 썩었으며, 대들보는 기울어져 위태롭게 보였습니다.어느 날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 한창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안 안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어린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사면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비록 이 불난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여러 아이들은 이불타는 집에서 장난하고 노느라고,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놀라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머지않아 불이 곧 몸에 닿아서 그 고통을 한없이 받으련만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나오려는 생각도 못하는구나.’
또 장자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 집의 문은 단 하나 뿐이므로 매우 좁아서 소견 없고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 것들한테 이 집이 한창 불에 타고 있어 무섭다는 말을 일러주고, 지금 빨리 나오지 아니하면 불에 타서 죽는다고 하리라. ’ 이런 생각을 한 장자는 그 여러 자식들한테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애가 타서 좋은 말로 타이르고 달랬습니다. 그러나그 어린 자식들은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서 믿지도 아니하고 놀라지도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여, 나오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불이 어떤 것이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동서로 내달리고 놀면서 아버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또 장자는 생각하기를‘ 이 집은 벌써 맹렬한 불길에 쌓여 있으니 저자식들이 지금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불에 타게 되리라. 내 이제 모든 방편과 수단으로 자식들로 하여금 이 화재를 면하게 하리라’ 그 아버지는 여러 자식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하는 구하기 어려운 장난감이 있는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들이 대문 밖에 있으니, 불타는 집에서 나와서 가지거라. 너희들이 달라는 대로주겠노라.”
자식들은 아버지가 말하는 장난감이 마음에 흠뻑 들어 서로 밀치면서 기뻐하며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그때 장자는 여러 아들에게 평등하게 큰 흰 소 수레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수레는 크고 높아 여러 가지 보배들로 장식되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면으로 풍경을 달았고 그 위에는 휘장을 쳤는데, 모두 보배와 영락으로 꾸며졌으며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 화택’의 비유는 유명한 법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단한 찬사를받은 예화입니다. 비유 가운데 장자는 부처님을 일컫고, 아들들은 중생을 말합니다.이 세상 사람들은 불난 집의 아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난 집에장난하고 노느라고, 불이 났는지 어디가 탔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불이 몸에 닿아서 그 고통을 한없이 받으련만,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탈출하려는 마음도 못내니 얼마나 미련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이 비유를 통해서 인생을 바로 보고, 바로 느낄 줄 알아야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난 집과 같다고 하는 현실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아야 하고, 둘째, 불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의 의미가 무엇인가? 셋째는 이 불난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무엇인가? 넷째는 장자가 어린 아들들에게 약속한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난 집에 비유하셨으며, 여기서 말하는 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삼계三界라고 합니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하는데, 욕망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삼계는 온갖욕망이 들끓어서 아주 괴로운 세계입니다. 그 욕망으로 갖가지 번뇌를 일으켜서 중생을 괴롭힘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음을 비유하였습니다. 번뇌와 괴로움이 그칠 사이가 없는 인간세계는 마치 불이 훨훨타오른 집과 같아서 괴로움이 가득합니다.
초기 경전인『 마하아밧가』에 보면,‘ 타오르는 법문’ 또는‘ 불타는 법
어’라고 하며,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불타고 있다. 눈과 그 대상과의 접촉도 불타고 있다. 눈이접촉한 데서 생기는 감수感受, 즉 즐겁고, 괴롭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것들도 불타고 있다. 왜 불타고 있는 것일까? 탐욕의 불, 노여움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귀도 귀로 듣는 소리도, 코도코로 맡는 냄새도, 혀도 혀로 맛보는 맛도, 몸도 몸으로 느끼는 감각도,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모두가 한결같이 타오르고 있다.”
이 초기 경전의 말씀을 새겨보면, 불이란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삼독심이란 탐욕貪欲과 진애瞋厓, 우치愚痴의 세 가지 번뇌를 가진 마음을 말합니다. 삼독은 삼계의 모든 번뇌를 포함하며,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번뇌로서,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룡毒龍과 같다고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은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접촉을 하거나 오경五境을 대할 때 분수에 넘치게 만족할 줄 모르고 탐욕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치심은 삼라만상의 이치와 도리에 어두워연기의 도리나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마음이고, 진심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은 삼독심의 갈애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 충만한마음가짐을 불로 비유했습니다.중생들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먹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망념妄念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마음속의 불을 꺼버리지 못하기 때문에온갖 망념을 일으키고, 이 망념이 악업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두려운 업장을 짊어지고 삼도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범부들은 자신이 불타는 집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불이 무엇인지, 집이 무엇인지 모르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장자의 어리석은 아들처럼, 우리 중생들도 자기 자신이 불씨를 안고 연기를 내뿜으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까닭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중생들이 바르게 인식토록 하고, 그런 연후에 그 불난 집에서 구출해 내기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자가“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어서 나와서 타고 놀아라.”하고 외칩니다.이 세가지 수레는 성문, 연각, 보살을 상징합니다.
성문승聲聞乘이란 부처님 세존을 따라 법을 듣고 믿으며, 은근하게 정진하여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닫고, 아라한과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연각승緣覺乘이란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자연의 지혜를 구하며, 고요한 데를 즐기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인연의 이치를 깨닫고 벽지불과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승菩薩乘은 육바라밀의 행을 닦아서 최고의 진리인 무상보리를 깨달아 중생교화를 염원하는 대승보살을 말합니다. 이를 마하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편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불난 집은 낡고 큰 집이라 했는데, 그 집에는 오직 문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 큰 집에 문이 하나밖에 없을까요?
불난 집이란 삼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난 집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삼계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삼계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이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만 삼계의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여기는 하나의 문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여부처가 되는 하나의 문밖에 다른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평소에 바라던 세 가지 수레 대신에,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하얀 소가 끄는 화려한 큰 수레를 준비하여 두었던 것입니다.장자는 아이들에게 흰 소가 끄는 화려한 장엄을 한 수레를 선사하였는데, 아이들은 아무도 그들이 바라는 수레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바라던 것보다 더 훌륭한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아이들에게 선물한 흰 소 수레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토록 갈구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위없는 바르고 고른깨달음, 즉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삼승三乘을 말씀하셨다가 정작 안내하기는 최상승의 깨달음으로 인도하셨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깨달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깨달음의 길을 걸어서 진정한 자기를 찾는 길입니다. 앞에서 그토록 고구정녕苦口丁寧하고 노파심절老婆心絶하게 말씀하신 삼계화택의 고뇌에서 벗어나 자기의 근본 성품을 보아 참 자기를 바로 느껴야 합니다. 마치 불이 이글이글 훨훨 타는 것과 같은 망념을 확실히 벗어나 순수한 자기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자기를 찾고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음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놓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을 가지지 않고, 일체마음을 일으키지 않는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쉬고 비우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은‘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했습니다.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쉬지 못하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왜 쉬지 못하는가. 요즘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음알이로 자라고, 알음알이로 중무장하고 알음알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큰재산이 되고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식 때문에괴롭고 어려워서 보통 인간으로서 한계를 넘지 못하니, 괴롭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쉬지 못하니 괴롭고 한스러우나, 불교는 좋은 수행법이 있으니 노력하기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수행법이 염불법이고 참선법입니다. 불자든 비불자든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느끼고, 참으로 행복하려면 불교수행을 해야 합니다.
염불하시는 분은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 보시고, 화두참선 하시는사람은 선정禪定에는 꼭 들어보십시오. 염불이나 참선을 하시다가 보면, 몇 시간이 지났는지, 하는 곳이 절인지 집인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정도까지만 되면 수행하시는 기분과 보람을 크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상이 없다’,‘ 오직 할 일은 이것뿐이다.’라는 확신을하게 되고, 불교를 만나서 불교신도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께 감사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가 될 것입니다.
봐도 보는 바 없으면 분별이 없고
들어도 듣는 바 없으면 시비가 끊어지도다.
분별과 시비를 몽땅 쉬어버리고
참 자기 바로 보아 스스로 귀의할진저.
----- 가을호(2014) 큰 스님 청정법어 입니다.-----
[이 게시물은 가람지기님에 의해 2017-03-02 09:15:51 금주의 법문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