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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시공 초월한 근원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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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02-25 21:53 조회2,6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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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초월한 근원적 주체

불교는 인도의 브라만교를 극복하고 인간본래의 참모습을 구경적(究竟的)으로 밝혀 인생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종교입니다. 그 깊은 불교의 근원을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실천해온 것이 바로 선(禪)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불교의 종교적 생명체라고 할 수도 있고, 교(敎)를 초월하여 그 근원에서 자유자재한 참사람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의 큰 뜻은 망식(妄識)을 탈각(脫却)하고 참된 자아를 스스로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참나’가 아닌 망식으로 얽혀 있는 고통스럽고 허망하며 분열과 불안을 가져오는 아집(我執)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정된 자아의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해야만 합니다.

가끔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정말 바르게 참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참선공부만큼 분명한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선, 참선’하니까 모두 어렵고 특별한 종교수행으로 알고 있는데 참선이란 욕망과 아집으로 뭉쳐진 삶을 근원적으로 비판, 탈각해서 진실하고 자비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가령 쉽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각 개인의 주관적인 틀에 맞추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현실은 지식이나 분별작용이 자기 주관으로 뭉쳐 있어서 삼라만상을 하나의 근본생명체로 깨달아서 투시하는 전인간적(全人間的) 입장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도구적 필요에 의해서 파악되는 지극히 협소한 개인의 주관적인 분별의 투영인 것입니다. 또한 서양의 철학은 인간의 일면, 즉 이성이 아니면 욕망이라는 한 단면을 가지고 인생문제라든가 세계관을 다룹니다. 그러나 선(禪)은 인간을 일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깨달아 이성과 감성을 초월해서 전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관적인 분별이 끊어진 경지가 선의 구경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분별이 끊어진 심층에서 작용하는 아뢰야식 역시 우리들의 현행의식(現行意識)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그대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보통 학문이나 사상은 이러한 현행의식이나 아뢰야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철학적으로 체계가 이룩된 진리라고 하더라도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지면 체계가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학문이나 철학체계가 생겨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래의 참모습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참선은 모든 분별적 지성(知性), 사고(思考), 무의식(無意識)마저 철저하게 탈각해버린 참사람을 깨닫는 것입니다.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이성과 반이성, 물질과 마음 등의 상대적인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모든 가치와 사유의 근저에는 절대이율배반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이성적 입장에 있는 현대적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참사람은 본래로 모든 이율배반적 한정을 초월한 참사람이며, 마침내 새로 각(覺)했다는 것도 없이 본래로 참사람인 것입니다. 이 참사람은 본래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시간, 공간에 한정됨이 없으며 본래로 청정무염(淸淨無染)하여 자유자재하며, 형상이 없으면서도 일체형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선은 이율배반적 인간이 진실한 자기, 참사람으로 돈연(頓然)히 전환하므로 무명번뇌를 일체단(一體斷)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과학적 지성과 생의 충동까지도 보편적이고 자주적인 정위(定位)를 지시해서 적극적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역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 같은 분은 경전을 탐구하다가 문자언어는 약방문에 불과하다고 깨닫고 참선을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성이 있게 인생의 문제를 실지로 해결하는 것이냐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맹목적으로 그저 따르라는 교조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실지로 해봐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공부를 바르게 하려면 화두를 간절히 참구해야 하는데,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 생명체가 지적인 의식을 초월해야만 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단(疑團)에 자기의 전 존재가 통일되고 또 긴장되어서 마치 백미터 달리기에서 ‘탕’하는 신호를 시작으로 달리는 순간처럼 몸과 마음이 한 생명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면서 더욱 순일하게 정진하면 의식분별이 끊어진 은산철벽의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화두가 분명하면서도 더욱 명백히 드러나며 의식의 기멸(起滅)이 없어져 버립니다. 선을 깊이 수행하면 그런 경지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기멸이 없어진 상태지만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않고 소소영영하게 화두와 의단이 일체가 되어 무의식차원까지도 뚫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절대이율배반이 해체되어 청정에서 일물(一物)도 없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경지로 전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앉아서 머물면 조사문(祖師門)을 투과한 것이 못 됩니다. 여기를 돈연히 투과하여야 견성(見性)하여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정법안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견성이나 자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본래면목 자체가 진실로 본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진실한 발심이 없고 참선 공부를 실지로 해보지 않으니까 참선이 어렵고 모르겠다고 하는 것일 뿐, 이 본래면목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주체성이며 참된 모습입니다.
또 불성(佛性)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지만 현실과 다르다고 해서 내재적 초월이라고 신비주의 주장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사람은 내재하는 것도, 외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사람은 바로 현금(現今)에 주체가 되는 절대현재라고 합니다. 참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근원적인 주체가 되어 모든 피동적인 자기상실을 극복한 자유자재한 인간 본래의 참모습입니다.

-서옹스님 ‘절대현재의 참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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