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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가 서린 '시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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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2-22 16:30 조회3,0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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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義氣)가 서린 ‘시드물’

 

 

봉화지역 여러 마을의 역사를 거슬러 가다보면 현재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생존해 계신 몇몇 선비 분들의 언행 속에는 성리의 힘이 느껴지곤 한다. 이 감동을 한마디의 말로 표현해본다.

“아! 조선이여 이것이 바로 너였구나.” 사극에서 찾아낼 수 없었던 숨소리 간직한 이 자리 진작 찾아오지 못한 게 한스럽구나.

성리(性理)의 떨림은 시공이라는 것이 장벽을 넘어 언제나 생생한 것. 선비의 넋을 확인하러 법전면 풍정리(시드물)로 설레는 발길 열어간다.

아 신천지(新天地)에서 솟아 오르는 샘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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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물을 개척한 이영기(李榮基)

 

이영기는 태종의 7번째 아들 온녕군의 6대손이다. 동대문 훈련원 근처에 살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영동지방으로 갔다. 돌림병이 돌아 모든 가족이 세상을 버렸는데 어린 형제만 남았다. 의지할 데 없어 안성 군수로 있는 이모부의 도움으로 고을 관아에 살다가 외가인 희여골(풍기군 백동리)로 와서 살았다. 외가와 친분이 있던 권래(權來) 눈에 들어 닭실에서 살게 되었다. 권래는 충재 권벌의 손자로 후일 이영기를 사위로 삼았다. 살림을 나면서 시드물을 상속 받아 안착하게 된다.

 

당대에 일구어낸 글

 

이영기는 슬하에 다섯 명의 아들과 열일곱 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이들은 과거에 급제한 이도 있어 시문을 크게 일으켰다. 그 가운데 ‘송월제’ 라는 정자에 살면서 학문을 떨친 이가 있으니 그분이 넷째 아들 이시선(李時善)이다. 그는 고전에 능통해 중국에까지 알려졌는데 어린 시절 전국을 주유하며 배우고 익혔다. 평생을 하루 두 끼 식사에 겨울에도 냉방을 마다하지 않으며 학문을 익히며 살다가 중용과 주역을 외우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생 등과(登科)하지 않고 처사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 2시간만 자며 배움에 전념하였다. 그 삶의 단면을 알려주는 시가 있어 인용한다.

 

푸른 산은 여 일곱 길이요

민가는 두세 채 있네

그 속에 한 선비 있으니

평생을 글 짓고 지우며 산다네

- 김 태환 번역

 

집안이 일시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 글이 살아있다면 정신에 날이 서 있기에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 겨우 내내 움츠렸던 산천이 봄을 만나 일시에 푸르름을 드러내 듯, 글은 생명을 잉태하는 씨앗과 같은 것이다. 징기스칸은 자손들에게 야율초재를 잘 섬기라고 하였다. 그는 이미 말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어서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광풍은 부드러운 풀 한포기도 건드릴 수 없다. 오늘이 유목 시대라 하여 모두들 말을 타고 달리는데 온 신경이 모여져 있다. 과학과 그 첨단인 수학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다만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경제와 과학이라는 물신(物神)의 열정(熱情)에는 눈에는 안보이지만 하늘의 이치가 관통하고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이 없는 무심(無心)이기에 의기(義氣)로도 그 빛이 드러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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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복권을 주장한 이도현

 

이도현(李道顯)은 이영기의 5대손이다. 당대 석학으로 계촌집(溪村集)이 전해오는데 역적으로 몰려 흩어진 문장을 사위가 간직하였다가 목판에 새겨 학문 세계가 후세에 전해졌다.

전통사회는 왕과 가(家)의 대립이었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징세 토지를 증가시키려는 왕권과 면세토지의 확대 및 독점을 꾀하는 문벌(門閥)의 긴장관계이다. 징세 토지의 확대는 세금부담의 편중으로 인한 서민의 부담을 덜게 되므로 개혁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혁군주가 왕권강화를 꾀하는 데는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조 집권 초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왕권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선세자(先世子 사도세자)의 복권을 통한 왕권의 강화로 특권 문벌의 폐해 개선, 이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도현은 사도세자 복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여섯 살 난 손자는 황해도 외지로 유배되었다. 살던 집은 헐리고 그 터는 파여져 연못이 되었다. 시드물 이씨는 70년간 과거가 금지되었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이도현은 복권 되고 자손들은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증손자 이승재(李承載)는 고종 사후에 3년간 흰 갓(白笠)을 썼다고 전해진다.

 

한일 합방에 죽음을 선택한 이면주(李 冕宙)

 

이 면주는 철종 1년(1850)에 과거에 입시하여 1891년 동부승지에 재수되었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짐에 곡기를 끊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교유(交遊)하던 안동군 도산의 이 만도공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음독하여 삶을 끊었다.

그렇다면 하늘의 이치는 ?

삶은 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천명(天命)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 또한 평상심(平常心)으로 반찬 고르듯이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천명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연못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맑으냐 ?”

대답하기를

“내 아래에서는 샘물(闊水)이 솟아오르기 때문이지”

(주자 詩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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