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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인간의 삶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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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06-01-21 17:51 조회3,134회 댓글0건

본문



축서사에서는 봉화에
불교교양대학을 열어 1년 과정으로 신도기본교육을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본지에서는 신도기본교육
교재를 토대로 불자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9회에
걸쳐 연재를 합니다. 따라서 기본교육을 이미 받은 사람은 본 연재를
통하여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고,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간략하게나마 지면을 통하여 배워서 불자로서 자격을 갖추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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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1. 인간의 삶과 불교


2. 불교의 성립과 부처님의
생애


3. 불자의 자세와 행동


4. 사찰의 구조와 불교미술


5. 진리의 세계 (기초교리)


6. 불교의 전파와 발전


7. 불자의 수행과 신행생활


8. 불교와 인생


9. 현대 사회와 불자의
생활


모르고 사는 인생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인생에 대해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친다.


돌아 보면 인생의 많은
시간은 즐거움 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날들이다. 환희의 시간은
기억에 없고 오늘도 정해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 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이 웃고
즐기며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인생역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즉,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그 행동을 계속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에게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조용한 광야를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밑에는 다시 무서운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만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온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칡넝쿨을 잡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나타나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데
그는 꿀 맛에 취해 왜 꿀을 더 많이 떨어뜨려 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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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성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하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慾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망,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욕심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하도록
해야 하겠다.


종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그 결과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였다. 종교(宗敎)의 정의는 최고의
가르침 즉,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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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긴 이래로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종이기에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인간은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 인류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하나는 신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절대적인 신을 창조주로
하는 종교는 이제 교통과 통신, 즉 과학문명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 접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의 역사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하다.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이 설사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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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불교’에서 ‘불(佛)’이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를 소리내어 읽은 음사로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란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성불(成佛), 즉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이 깨달음의 경지는 신조차 초월하는 경지인 것이다. 많은 불교 경전에
보면 하늘의 여러 신들이 부처님께 귀의하며 정법을 지키고 정법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발원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지마저도
뛰어 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정진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알고 행하며 사는 사람의 인생은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이 된다.불교는
바로 부처님이 깨달으셨던 진리,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지혜의 길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온다.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전환할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뀌게 될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이다. 즉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지혜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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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즉,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해주지 않았거나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경우 화가 나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다 부질없는 일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자신이 낸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욕심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으면 남을 나처럼 생각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결과가 올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그 잘못된 행동에서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행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새로운 밝은 세계가 나타나게 된다. 불교는
이러한 세계를 열어 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서 진리를 가르쳐
자유롭고 편안한 인생이 되게 한다. 인생의 새로운 가치에 눈 뜰 때
삶이 변한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불타는 집과도
같은 이 세상을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저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 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 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처럼 보아 《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행하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함께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수행과 믿음을 함께
가진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수행체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전환시키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바꾸게
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르다. 수행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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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三寶)에 귀의하여야 한다.


삼보란 세간에 비할
데 없는 세 가지 보배라는 말로서, 온갖 지혜와 공덕으로 이루어진 부처님(佛)과,
열반의 진리에 이르는 길인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들(僧)을 말한다. 이 삼보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고 하는데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고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이다.


불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를 공경하여야 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덕과 부처님의 큰 가피로 고난을 이겨나갈 지혜와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떤 믿음으로
정진해야 할까?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믿음은 근본이니
진리의 가르침을 즐겨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僧)에 귀의하여
올바른 믿음으로 항상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 자신을 낮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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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 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을 바로
하심(下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있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이며 참회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서 중요한 것이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그런 악업을 짓지않도록 하는 것이며,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은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허물이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허물이 있거든 곧
부끄러워 하여 참회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 고쳐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반드시 도(道)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불교적인 삶


1) 오계(五戒) - 불자의
기본적인 실천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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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인 밝은 광명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빛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걸음일 것이다. 만일 등불이 없다면 우리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될 것이며, 잘못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육신의 상처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등불은 바로 진리의 가르침이고 밝은 곳을
향한 발걸음이 바로 계율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잘 지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으면 저절로 밝은 지혜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셨다. 선정과 지혜를 닦는 데는 지계가 그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순간에 죄를 짓는
일, 복을 짓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항상 몸과 말과 생각을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아난 존자가 “이제까지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하고 묻자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以戒爲師)라고 말씀하셨으니, 불자가 스승으로 삼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실천덕목이 바로 오계(五戒)이다.


1.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 불살생(不殺生)


2.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 불투도(不偸盜)


3.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 불사음(不邪淫)


4. 거짓말을 하지 말라.
- 불망어(不妄語)


5. 음주를 하지 말라.
- 불음주(不飮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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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그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이는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으며,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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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법우를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예를 표한다. 합장은 흩어진 마음과 생각을
모아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하는 합장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며,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여기엔 또한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 공양 전후에도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공덕이 될지언정 어찌 다른 이들에게 해로움을 끼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불공(佛供)을
할 때나 발원을 할 때도 부처님을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보다는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발원하여야 한다.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 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리 부처님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이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생활 속에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정진해 나가는 것이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결심이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 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숫물이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태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작은 불씨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촛불이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의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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