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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7/19<불교개론5-선의 세계1> 강의 요약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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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상화 작성일12-07-24 03:43 조회2,842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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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세계 1 강의 요약 보고서

 

강의 제목 : 불교 개론 5 <선의 세계1>

강사 : 달마 거사

강의일자 : 7월 19일

 

선(禪)은 어렵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 사실은 선이 가장 쉬움. 불교대 오시는 분들 대부분 원래 사찰을 가지고 계신 분들 대부분 일 것. 경전, 기도, 선 등 (경험) 하신 분 있으실 텐데 그 중 선이 가장 쉽다. 그래서 좋아하고 조금만 노력해도 할 수 있으니 좋다.

 

선은 땀을 안 흘려도 됨. 108배나, 참회, 자비도량 등 공부는 땀이 남. 기도발 받는다 싶으면 1000배로 무릎도 아프고 고생하신다. 경전 들여다보면 그냥 여러분들 눈에 해독이 되어 가슴에 박히면 좋겠다. 스님보다 더 똑똑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문 공부 무진장해야 한다. 해석서들은 부처님 말씀을 또 해석해서 곁들여 진의를 벗어나 있음. 해석한 분의 허물이 있을 수 있음. 어쨌든 (이해에) 노력 필요함.

 

그러나 선은 걸을 수 있고 앉을 수 있으면 좋다. 한문 몰라도 선을 한다. 게으른 분이나 시간 내기 어려운 분 모두 하기에 딱 좋음. 선이 어렵다고 이야기 되는 것은 선이 불교의 골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선을 만져보시게 됨. 선을 못할 사람 한 사람도 없음. 뒤로 물러서지 말고 학기 초에 결심하시고 불교대 들어오실 때 마음 퇴색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오늘 계기로 초발심을 회복해 보시라.

 

만공스님 왈, (다 우리들 두고 하신 말씀 같다)

“어떤 사람들이 선을 할 수 있는가?”

“간장 찍어 먹어 보고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할 수 있다. 한문, 글자 몰라도 구분만 되고 느낌 오면 참선은 모두 다 할 수 있다.”

경전에 나오는 가르침이 모두 내 몸과 마음에 다 들어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 선이다. 팔만대장경,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 방대하게 남기셨다. 20년은 공부해야 한 번 씩 볼 수 있을 것. 외국 것들까지 다 모으면 훨씬 더 방대할 것. 경전 공부는 끝이 없다.

 

선은 우리 몸과 마음이 이렇게 생겼음을 말씀하심. 글자 통하지 않고 내 마음 일어나는 형상, 작용 등을 내 눈으로 확인해서 경전 말씀이 전혀 차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 여러분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1학년 1학기에는 여러분이 부처란 가장 중요한 사실을, 2학기에 기본 수식관을 2학년 1학기에 선의 정신을 깊게 다루며 화두를 다룰 것.

 

가끔 ‘내가 부처일거야.’라고 생각해 보셨을 것이다. 여러분이 부처이다. 이것을 확실히 인식 하셔야한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누누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역대 선지식, 조사께서 여러분이 바로 부처를 강조 하셨음. 이것 떠나 한 마디 할 게 없음.

 

법당 가면 불상이 있다.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정말 부처님으로 보이는가? 무엇이 부처인가? 과연 비로자나부처님 형상이 부처인가? 거기다 대고 절하는 사람이 부처이다. 어느 법당에서도 부처를 본 적이 없다. 모양에서 부처를 볼 수 없다고 선은 가르친다. 불상 앞에 고통스럽고 힘겹게 무릎 깨지도록 절하는 것이 부처이지, 무정물이 부처라는 것 용납 안 됨.

 

<금강경> 49게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니라. 모든 모양으로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모양에 따라 일으키거나 갖게되는 가치관은 다 실제가 없다. 모든 형상화는 허망, 그 모양이 가지는 가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음성, 소리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 모양으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 허망할 뿐이요 사실은 모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바로 여래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이 곧 색이요 색이 곧 공이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색불이공 공불이색). 우리는 그 색의 모양을 하고 있음. 그대로 공이요, 공이 곧 여래다. 여러분을 떠나서 부처가 있다 하는 것은 바다를 떠나 파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바다 떠나(본성품) 부처 없다.

 

‘내가 부처’라고 하는데 내 꼬라지는 왜 이 모양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떳떳하게 살지 못함. 작은 생각에 얽매여 있음.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고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면 맹물처럼 밍밍하게 사는 건지, 아닌지 상태로 삶.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괜찮다. 하지만 고통이 따른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고통, 헤어지는 고통이. 청춘 남녀가 또 바뀌면 뭐가 안 맞아 헤어지게 되고 원수처럼... 얼굴 볼 때마다 고통스러움.

거꾸로 사랑할 때 못 만나면 괴로움. 20분 전 봤는데 집에 가 있으면 보고 싶다 의견이 안 맞으면 슬슬 미워져,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야 라며 마음이 괴로움.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칼로 살을 에는 듯 한 고통, 밍밍한 고통도 있고. 보람 느낄만한 즐거움이 있으면 좋다. 역시 인생은 아름다워~. 그것에 속아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 먹음. 죽음, 죽음이라는 것에 치여 갖은 고통, 공포 느끼고 당함. 또 태어나도 완전하게 못 삶. 죽을 때도 완전하게 죽지 못함. 또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

 

생,로,병,사 기본적인 4가지 고통(四苦)에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고, 원수는 만나고 생각 생각 번뇌가 치솟는 8고(八苦). 사실은 자욱 자욱이 고통이다.

*주: · 원증회고(怨憎會苦) : 원하지 않는 사람 또는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

· 애별리고(愛別離苦) : 원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이별하는 고통

·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 오음성고(五陰盛苦) : 오온(色․受․想․行․識)*과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가득

차는 고통 또는 오취온(五取蘊) 자체가 고통

 

부처는 고통이 소멸된 자가 부처이다.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 자, 한 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 완전자가 부처이다. 우리 모습이 부처이다. 찌질이도 못나게 살아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자는 불제자의 준 말. 부처를 스승으로 모신다. 엄연히 가르쳤는데도 이해는 못해도 믿기라도 해야. 이해도 안 되고 믿지도 못하면 제자라고 할 수 없음.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었으니 일단 믿기라도 해야.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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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나가 실감이 안 나기 때문에 이것 밖에 못 느낌. 지금의 나란 금강경 말씀처럼 이것이 허망한 줄 알아 없는 줄 알면 자동적으로 원래 부처로 돌아감.

 

본래 없는 나가 왜 생겼는가?

내 몸, 마음, 생각을 가리켜 ‘나’라 함. 본래 없는데 만들어 냄. 이 범위를 ‘나’라고 느낄수 있고 이름 붙일수 있는 것을 벗어나 있음. ‘나’라는 인식 내에 가상의 존재를 만드니, (내) 인식 밖의 범주는 전부 ‘너’가 됨.

 

나는 너보다 잘 되어야 돼. 뭐보다 내가 못나면 견딜수가 없다. 탐진치 일어나 작동하기 시작함. 내가 너보다 못났다 생각하면 성질난다. 탐심과 성냄 둘 다 동시에 발생, 그 중심에는 ‘나’라는 개념이 있음.

 

유식론과 중론에 자세히 나옴. ‘나’란 개념은 일방적, 편의적 가상의 개념이다. 남보다 못났으면 화가 남. 점점 정신없고 엉클어짐. 어리석은 마음 점점 깊어짐. 악순환... 모두가 ‘나’에 매달림. 이 속에 갇혀 난리 침.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 그 과정 속에 ‘나’라는 이 개념이 어떻게 하면 잘 나 보일까, 훌륭해 보일까 고통만 키우게 됨. 100생을 윤회해도 갇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스스로 만든 것이다.

 

선, 견성, 해탈(解脫), 풀 해, 벗을 탈. 열반은 해탈하면 나고 죽는 윤회를 멈춤이 열반이다. 해탈은 어디로부터 벗어나는 것인가?

 

어느 스님 왈, 스님 저를 번뇌로부터 해탈시켜 주십시오. 그 스승 왈, 이놈아, 누가 너를 묶었는가? 자신이 묶었는데 스승에게 풀어 달라 함. 이것이 풀어질 일인가 아닌가? 풀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업이라 함. 업이 업으로 묶음.

 

이 ‘나’라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아는 것, 끔찍이 여기는 것이 허망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나’는 사라지고 본래 나는 회복 됨.

 

예전 안수전(정)등 *주: <빈두설경賓頭設經>에 나오는 화두. 들판에 불이 나 갖은 짐승들이 내 쪽으로 뛰어 옴. 나도 있으면 죽을 판. 도망가다 보니 본능적으로 뛰어 든 곳이 우물, 뭔가 잡긴 잡았으나 올라 갈 수 없음. 손에 잡은 것은 중간쯤부터 자란 나무 뿌리, 아래 보니 발끝 독사들이 발 닿을 것만 기다림, 위로는 흰 쥐, 검은 쥐가 나무 뿌리 갉아 먹고 끊어지면 죽음.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뭔가 혀로 달콤한 것 떨어짐. 벌집에서 꿀물 떨어져 핥음. 죽음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꿀맛에 잊음.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을 살릴 것인가? 누가 대답해 보라. 어떻게 하면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의 정답을 말하면 그 분은 깨달은 것임.

 

우리의 중생의 처지를 기막히게 짜 놓은 것임. 꼼짝없이 우리는 죽는다. 그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음. 사랑할 때 잊고, 이별하면 이별의 괴로움 당하면서도 잊어 먹고 또 맘에 드는 사람 만나면 다시 사랑의 고통에 빠져 듦.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상대적인 생각에 빠져 있음. 사랑하면 미워할 준비 되어있음. 다른 종교는 선-악을 구분. 불교는 안 나눔. 선 개념을 세우면 자동적으로 악이 같이 세워짐. 선을 무너뜨리면 악이 자동적으로 사라짐. 서로 기대어 성립되기 때문. 사랑이라는 마음이 성립 안 된 마음에는 미움이 없음. 미운 마음 성립되면 사랑 개념도 내재되어 성립 됨. 불교에서는 연기라 함.

 

서로 상대적인 것, 원인과 조건의 상대적인 이 세계는 연기의 세계이다. 상대적인 개념들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허깨비로 일어서 있는 것. 남의 생각은 절대 실재한다고 믿지 않음. 지 생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착각함.

 

조건은 늘 변한다. 원인, 조건이 바뀌면 계속 바뀜. 마치 사랑했지만 조건이 바뀌면 미워할 수도 있다. 잠시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바뀐다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잠시도 바뀌지 않는 순간은 없으므로 어느 것을 찍어 ‘이것’이라고 하기 어려움. ‘나’라는 이 마음, 몸도 원인, 조건에 의해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삼법인(三法印)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여러 현상을 현상적 측면에서 보면 제행무상이요, 가치적 측면에서 보면 제법무아라, 잠시도 변하지 않고 있지 않으며 가치 부여하는 순간 없어지니 무아라. 무상, 무아임을 보고 집착 버리면 열반적정(涅槃寂靜; 깨달음)이 옴. 남방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무상하고 무아인 이 몸은 모든 것이 고통 밖에 없다. 대승 불교에서는 그러한 고통도 무상, 무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글자로 표현하면 공(空)이다. 이 세계의 본바탕이 비어 있으므로 열반적정이다 하여 삼법인으로 침.

 

몸과 마음, 여러분이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은 공하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다. 지은 죄업이 지중해서 지옥에 떨어져 불구덩이 속에서도 나는 부처다 해야. 그러면 화탕지옥이 순간적으로 감로극락으로 바뀜. 지옥과 극락은 다 마음 속에 있다.

 

극락 즉 천당이다. ‘나’라는 있지도 않은 나 개념을 마음이 만든 것처럼 뜬금없이 만든 세계가 지옥이다. 마음이 만들었으니 극락도 없다. 지옥이 있으면 극락도 만듦. 극락이 먼저인가, 지옥이 먼저인가?

 

불만은 자신의 탓, 부모님 탓이 아니다. 부모님 잘 만나서 누리고 교만에 빠지면 다음 세상은 정해져 있음.

 

기독교나 이런 곳은 숭배 또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절대자가 마음 고쳐먹으면 이쁘게 봐 지옥 갈 나를 천당 가게 해 줌. 불교는 자신이 저지르면 어디다 대고 빌 데가 없음. 자기가 다 가지고 가야. 전통적인 신화로, 사람 죽으면 염라대왕 뭘 보고 정할 것이냐? 판단 도구가 업경대라. 업, 그 사람의 삶이다. 거기에 다 보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염라대왕 없음. 지가 알아서 감. 죽은 영가가 짐승처럼 살았으면 스스로 축생의 태에 들어감. 못된 짓을 했어도 천상 세계로 어거지를 써서 가면되지, 지키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건 없음.

 

부처님, 보살님의 자비심은 절대적 속성을 갖기 때문에 아무리 못된 중생이라도 전혀 고통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실 분들이다. 못된 놈도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음. 지옥문에서 중생 위해 지장보살 눈물 흘리심. (천상으로) 곧바로 갈 수 있는 진리, 궁극의 그런 길은 없다. 그렇다면 중생이 자기가 부처임을 알도록 만들어 주겠다. 방법은 허상을 깨닫게 하면 ‘나’를 벗어나 본래 부처를 회복한다. 바로 열반에 들게 된다.

 

남방의 위빠사나, 티벳의 금강승 탄트라, 중국, 한국의 참선. 선지식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 가르치신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이것이 가짜라는 것만 알면 된다. 우리 고집에 집착, 어리석음 너무 깊어 너무 깊고 질기기 때문에 안 놓음. 이것만 놓아버릴 수 있다면 오늘 밤 내로 성불. 우리의 본바탕=본래 나=부처가 바탕이니 아무리 절망적인 그림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본래 무상, 무아이므로.

 

지금부터 이것을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은 선이다. 팔만대장경 이해해서 본래 이것을 확인하겠다하면 3아승지겁의 세월이 걸린다. 참선 잘 하면 금생에 성불한다.

 

경전 보는 방법, 경전 가지고 주문 외우려고 하면 안 됨. 그 뜻을 해독하는 것이 목표. 그 뜻 전부 다가 나의 몸, 마음이 그렇다더라 해야 공부이다. 그냥 읽어대면 항상 남의 이야기. 선은 어떻게 한다? 본질은 내가 부처다. ‘나’라는 허상에 갇혀있음. 갇혀있기는 하지만 부처 성품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부처의 성품으로 재주 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래 비누 조각, 어떤 사람이 별별 모양으로 조각하더라도 모양은 다 다르지만 그 재질은 비누이다. 이처럼 부처의 성품으로 중생, 중생을 지은 재료는 부처의 성품이다. 돌지 않고 직접 들여다보는 게 선, 그러면 성불한다.

 

이런 질문 있을 수 있다. 참선하면 신심이 떨어진다고. 참선 위주로 하면 기도 등 못하게 되니 혹시 그런 분 있는가? 참선은 기도할 때 보다 더 위의 신심 요구한다. 기도의 대상은 부처, 보살이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참선은 내가 믿음의 대상이다. 기도할 때 내 존재가 기도 대상, 그 대상이 본래는 나 자신이다. 선에서 이야기 하는 신심은 내가 부처다, 보살이다. 이렇게 까지 이동 된다면 중요한 변화이다.

 

관음, 아미타, 지장보살님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지금부터는 여러분이 아미타불, 관음보살이 되어야. 이 변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제는 무릎 깰, 절이나 빌 일이 아니다. 나의 창살 없는 감옥은 실제 비어 있는 것, 갇혀있지 않음을 빨리 알게 됨.

 

정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에서 현재 이것은 정해짐. 내 업 그대로이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주팔자는 백번 천번 마음먹는 걸로 고침. 내가 부처님의 마음 일으켜 도와 줄 때 그 사람 필요한 것 도와 줌. 이야기 들어 줄 사람, 경청,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해 줄 수 있는게 달라짐. 그 사람의 궁극적 행복을 도와주는 것은 절대적 행복=이유 없는 행복=조건 없는 행복이어야. 결혼 등은 상대적 행복이다.

 

그냥 행복해야 한다. 깨닫지 않고 안됨. 깨달은 자만이 절대적 행복 누림. 남을 돕는다는 것은 절대적 행복, 깨달음 얻게 돕는다는 것은 우선 내가 깨달아야. 내가 참선 수행하겠다는 보리심 내야. 발심, 초발심 등 발보리심의 준말.

 

이 보리심은 24시간 늘 있어야. 이분들이 보살이다. 보리심 내려면 자비심이 있어야. 이웃의 슬픔, 고통에 내 가슴이 아파야. 그래야 해 줄 생각 남. 내가 먼저 깨달아야 공부 안할 수 없다.

 

여러분들 중 참선 안해도 되는 분들 있다. 영원히 안 죽을 분들이다. 고통 중 나고 죽는 고통 가장 크기 때문에 완전 해결은 깨닫는 길 뿐이다. 나고 죽을 줄 알면서 공부하지 않는 것은 자기 (의무의) 방기이다. 스님들 만 분이 대신 죽어줘도 나는 죽는다. 금생에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거짓말이라면 당연히 지옥 가는 것이다. 발설지옥. 이 나에 매달려 있으나 공함을 깨치면 지옥, 천당이 공하다.

 

참선 중 만신 앞에 화두 붙들고 있으면 볼 수 없음.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음. 불자들도 그 만신한테 가서 굿을 한다. 자기 보배는 어디다 팽개쳐 놓고. 절에 보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 빌어달라고 부탁. 여러분의 죄업은 여러분의 마음속의 것,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음. 아무리 목 터지게 기도해도 죄업 그대로 가져감.

 

수계받은 불자라면 이제부터는 참선 수행자라 할 때에는 여러분의 생사문제는 여러분의 몫이다. 진실된 것을 진실되다고 수용하는 것이 선이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자신만이. 부처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시는 분이다. 나 대신 부처 필요 없음. 다른 종교 가 봐도 안 됨. 원리가 그렇게 안 됨. 모든 고통, 지옥, 천당은 나로부터. 업의 모습도 본래 공하다고 깨달으면 됨. 업의 효력은 있다. 목숨으로 갚아야하는 업이어도 옅어진다. 돌부리 한 번 걸려 넘어지는 정도로. 업이 다 업의 성향 갖지 않고 종자의 성향 가지게 하는 것,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 선이다.

 

나의 대표적 성격은 생각이다. 늘 일어난다. 마음은 잠 잘 때도 쉬지 않는다. 꿈을 통해 드러나거나 꿈은 없어도 깊은 차원에는 생각이 요동친다. 현재 의식에 감지 안 될 뿐. 생각에 놀아나면 참선 안 된다. 가장 힘든 게 생각에 놀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탐진치 영역에서 일어남. 생각의 특성은 학습의 효과를 가진다. 나쁜 생각을 계속하면 더 강해짐. 비슷한 생각을 거듭하면 더 업이 무거워지고 진해짐.--> 습관-->고정관념으로. 생각이 안 일어나는 순간 없음.

 

왜 지금까지는 선이 아니었나? 이것을 관하고 바라보는 것을 안해서. 관하기 시작하면 선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는 것., 못 느끼면,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생각에 끌려 감. 화난 나, 즐거운 나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둘 다 아님. 가짜의 나에 속음. 분노나 즐거움은 상대적인 개념. 존재한 것이 아니다. 내 처지에 맞게 바꾼 것.

 

그것을 느끼고 바라보아야. 그것이 선이다. 그러면, 내가 화를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음. 선택의 여지없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을 알았다면 화 낼 수도 있고 참을 수도 있어, 선택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인된 자만이, 사장만이 직원 채용 또는 내보낼 수도 있는 것. 알아차려서 따라 갈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이것이다. 선사들이 말한 주인공. 그동안 생각에 끌려다닌 삶은 주인된 삶이 아니었다. 주인이긴 하되 속고 끌려 감.

 

고봉스님의 <선어록>에 도둑놈이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면 도둑을 잡지는 못할지라도 도둑을 맞지는 않는다. 모르면, 깊이 잠들면 도둑질 당함. 느끼고 알아차리고 볼 수만 있다면 완전한 주인공.

 

앉아서 하는 것이 선은 아니다. 늘 밥 먹고 듣고 말하고 걷고 누워 잠자면서 하는 것. 일주일간 실험하시라.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려라.

생각이 일어나면 내려놓으라. 생각대로 끌려가지 말라.

바라보면 사라진다.

흘려보낸다.

 

이것은 좋은 것, 안 좋은 것 성격 부여하면 또 다른 생각 불러일으킨다. 단지 바라보고 있으면 사라진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것은 인연 관계로 어우러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인연 없음.

 

경전에서 말한 불교 핵심 그대로 체험. 내 생각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고 내려놓을 것이다. 하루 십 분이라도. 생활 패턴에 따라 좋은 시간 각 자 정하시라. 모든 현상에서 속고 살았음. 더 이상 끌려가지 않는 것, 여기서부터 선 시작. 여러분 본질은 부처이다. 여러분 떠난 부처 없다.

 

다음 주는 호흡 바라보면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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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부처인 본래 활불, 인불임을, 나고 죽는 고통을 금생에 벗을 수 있는 자는 자신뿐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시는 명쾌하고 짬 진 강의 감사합니다.

 

건강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_()_

 

댓글목록

묘광명님의 댓글

묘광명 작성일

새벽녁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이렇듯 어여삐 글을 올려주시니

그저 고맙고 감사하네요

도반님들이 다시 한시간 강의를
듣는 기분일것 같아요

이렇듯 좋은 글을 마주하게 된
인연에  감사하며....

성불하세요()_

선행화님의 댓글

선행화 작성일

생각을 내려놓기란 참 힘이 듭니다.
흘려 보내기란 더더욱 힘이 듭니다.
내가 생각을 잡고 있지 않은데도
생각이란놈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생각.............
생각...............


내려 놓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공부하고
또,
공부할 수 있도록 애써 주신 길상화 보살님 감사_()_
서기님의 행복해탈을 기원합니다.^.^_()_

무루님의 댓글

무루 작성일

길상화님 야참으로 드시라고 손무가 술떡을 드리고 왔네요.^  묘광명님의 보시 공양물 감사. ^^

길상화님의 댓글

길상화 작성일

손무 소나무님->무루님->묘광명님 순으로 기지떡이 왔네요.
세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썼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아니고 11시 퇴근해서 흐리멍텅하게 작업해 올리느라
덕분에 그 시간까지 출출하지 않고 고맙습니다.

다른 분들도 좀 보고서 올려들 주시면 공부가 많이 되실텐데요.
모두가 다 사이트에 올리는 걸로 숙제를 내는 단체들도 많습니다.

선행화님이 가장 중요한 도둑을 알고 계시니
곧 잡으실 것이라 믿어집니다.
여러 작선에, 정진하시는 모습 배워집니다.

건강행복하시기를_()_

달마님의 댓글

달마 작성일

우아!!! 길상화 보살님...고생하셨다는 말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