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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11/22 <불교개론9-선의 세계3> 강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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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상화 작성일12-11-30 00:04 조회2,81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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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세계 3 강의 보고서

 

강의 제목 : 불교 개론 9 <선의 세계3>

강사 : 달마 거사

강의일자 : 11월 22일

 

불자로서 우리가 선을 하는 목적은 생활을 위해 필요. 불교의 선은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닫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빠른 방법. 깨달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러분의 선택 나름이다. 선을 깨닫겠다고 생각하면 깨닫게 됨.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선이다. 불자에게 있어 필수적이다.

실제 현상은 그렇지 못함. 누가 뭐래도 정말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것. 깨달음이 뭐냐? 정말 나와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와 만나지 못하는 것이냐? 그렇다. 정말 자기 자신과 만난다면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 외로움이나 슬픔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런 감정이 자리 잡을 여유를 두지 않음.

전생일은 두고라도 금생 따져보면 자기 자신을 만나보지 못함. 그 근거는 무엇인가? 집안 식구나 이웃집, 친구들은 소상히 앎.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그렇게 설명이 안 됨.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은 웬 통 바깥일에만 관심 두는 것이 우리의 습관.

성경에 남의 흉허물은 잘 보아도 제 눈의 티끌 하나 살필 줄 모른다고. 사는 방식을 나에게 두지 않고 나의 바깥에 두는 습관 배어 있음.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자기, 살고 있는 것도 자기인데 자신을 모름. 정작 자신을 만난 적 없음.

선에서 깨달음은 부처를 이룬다, 성불한다, 즉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무엇과 만나는 것인가? 자기 마음과 만나는 것이다. 연애든, 선이든 결혼하신 분들 먼저 무엇을 하나? 처음에는 만나야. 전에는 그 분이 누군지 모름. 중매인 통해 알았다 하더라도 진짜 그 분의 모습 본다 할 수 없음. 그 전에는 지구상에 그런 분이 있는 줄도 모름. 만나고 난 후부터 관심, 이야기 통해 알아 감. 반려자라는 믿음 생기면 결혼함.

나와 스스로 만나는 것도 똑 같다. 나를 알고 살면 부처요, 모르고 살면 중생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를 보아야 하고 나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은 볼 관, 마음 심. 호기심을 갖고 더 자세히 보는 것. 내 마음을 보기 시작함. 100% 완전히 알 때 그 때가 깨달음.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100% 알았다면 불교에서는 왜 부처가 되었다 하는 것인가? 여러분이 태어나 지금까지 써 오고 있는 그 마음, 그게 부처이기 때문. 마음을 완전히 아는 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것.

선이란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 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눈도 자기 자신 속은 안 보임. 귀도 내면의 소리는 안 들림. 눈, 귀, 코, 입, 촉감 등 전부 마음이 외부와 소통하고 교통하기 위한 수단. 외부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기관.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있음. 가슴 만져보면 모두 심장이 뛰고 있음. 혹시 안 뛰시는 분? 마음이 뛰게 만들기 때문에 뜀. 마음이 그러지 않게 하면 언제든지 멈춤. 이 몸뚱이는 나무토막하고 똑 같음. 그저 마음 시키는 대로.

마음을 만나야 하나 참 어려움. 모양과 물질로 되어있지 않음. CT, MRI, 내시경, 현미경,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음. 냄새 맡는 센서로도 안 잡힘. 음향 탐지기로도 소리 안 들림. 맛 볼 수도 없음.

몸의 감각기관에만 익숙해져 있는 정신 상태로는 마음을 찾을 도리가 없음. 그래서 만나기 어렵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것도, 듣고 계시는 요것도, 마음을 보겠다는 이것도 자기 자신이기 때문. 마음이 제 스스로를 못 봄. 모양이 없으니 더군다나 더 못 봄.

우리가 제 스스로를 볼 수 있는 방법은 거울이다. 마음 비춰보는 거울 있으면 마음이 보임. 그게 뭐냐?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어 주는 것, 집중이다. 그 때부터 마음이 거울처럼 변한다. 아무것에도 집중 않고 있으면 생각 등이 일어나는 줄 모름. 몸은 생각대로 함. 집중하면 그 때부터 마음의 거울이 되어 생각이 일어나는 걸 알게 됨. 생각이 일어나는 걸 알게 되면 일어나는 걸 알면서 행하게 됨.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생각, 감정대로 안할 수도 있게 됨. 본래 마음은 생각, 감정 일어나지 않으면 잘 볼 수 없음. 일상 언어로 생각이 일어난 것을 느끼는 것, 기쁜 감정이 느껴지고, 느껴지는 대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것. 생각이 일어난 대로 그대로 해야 하나?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그 자체가 마음이 못되게 시키는 것을 무조건 따라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마음은 항상 상대적이다. 생각이나 감정은 마음이 작용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파도란 이름도 바닷물이다. 마찬가지 생각과 감정도 마음이다. 바람이 바다를 만나 듯 생각과 감정이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만났을 때 마음이 움직임.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마음이 알아차릴 수 있다면 곧 마음을 아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특히 중요. 부처님께 매달리면 그 일이 해결 가능하기도. 기쁘거나 즐거우면 부처님 잊는다. 그것도 내려놓아 보라. 기쁨이나 즐거움도 본질 차원에서는 고통이다. 꼭 괴로워야 고통이 아닌. 모두 고통의 범주에 들어 감. 집착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전부 고통이지만, 집착 없는 마음으로 보면 모두 지혜이다.

우리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 감정을 알고 느끼는 것이 곧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것 외 전혀 없음. 그러나 생각, 감정에 놀아나면 절대 못 봄. 그런 생각, 감정에 놀아나지 않아 볼 수 있어야 내 마음의 주인이지 그렇지 않으면 노예이다. 마음의 노예는 중생, 마음의 주인은 부처.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채는가? 집중할 때. 수식관(隨息觀)은 입문 과정에서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집중하는 방법. 염불은 무릎 까지도록. 보기에 장해 보이나 부처님 부르더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

생각 염(念)자는 지금(今) 의 마음(心), 지금 내 마음, 부처(佛)를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염불이다. 부처를 생각하는 방법에는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방법, 부처님의 자비심을 생각하는 방법, 부처님의 모습(모양)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어디에 해당되어도 다 염불. 하지만 입에서만 관세음보살 외고, 그냥 절하는 데 정신 줄 놓고 절하는 것 염불도 기도도 아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간절히 생각하면 그게 염불이다.

염불이나 기도로 복 받고 소원 성취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 두 요소 중 마음이 우리의 본질이다. 신경, 감각이 있어도 마음이 몸에서 떠나 버리면 못 느낌. 통점(痛點)등은 마음을 통해 앎. 여러분의 생김새가 마음에 안들어? 그것도 여러분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것. 마음의 작용. 긍정적, 부정적 측면 다 있음.

지금 내 마음이 부처님을 만나고 있고 무엇을 보느냐 따라 마음이 물든다. 환경이 거칠면 오랫동안 생활 하다보면 함께 거칠어짐. 지금 내 마음이 부처님 만나면 내 마음도 부처님으로 물든다.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게 됨.

염불 위력도 있고 기도 복도 있지만 그다지 가치 있지 않음. 몸 내려놓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 몸 있을 때만 욕망. 몸과 마음 같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느낀 그 차원만큼 다음 생에 또 나옴. 다음 생을 결정하니 금생을 잘 살아야.

지금까지의 삶 되돌아보면 다음 생 알 수 있음. 따따블로 나아질 일 없음. 그냥 그 만큼, 지금 살고 있는 만큼 금생 하던 짓 내생에 또함.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으로 갑자기 변화? 똑같음. 요만큼이라도 가면 다행이고 후퇴하지 않으면 다행.

참선의 모든 수행법은, 부처님 가르침 등 마음을 더 좋은 가치, 훌륭한 내용들로 마음을 물들여 주는 것.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도 돌아 감. 궁극의 공부가 되지 못함. 왜? 부처의 미신력, 이름, 덕이 마음을 물들여 내 마음이 고상해진다. 그러나 부처의 존재가 살아 있으면 다른 존재도 살아 있게 됨. 부처가 있으면 중생이라는 개념도 따라 붙게 됨.

우리가 참선하는 건 우리가 부처라는 걸 확인하는 것. 염불도 우리가 부처님 닮자고 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부처다. 부처가 부처를 닮는 것 아님. 뭘 또 부처를 닮을 것인가?

그래서 선이 있다. 진정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알아내는 것. 선이란 그 무엇을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님. 아주 지극한 궁극의 나를 알아내는 것. 선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 진짜 자기가 되었음.

관세음보살 상 좋음. 불단 조성한 불상들 장동건보다 잘 생기지 않았어도 그가 가지지 못한 기품이 있음. 생명체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면류관의 관음보살 생각해 보라. 길에서 만난 모두가 관음보살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금방 싫증 날 것.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토는 모두가 부처임을 수용하는 세계. 자기 본질에 통달, 요달한 부처이지 똑같이 닮은 부처가 아니다. 다 자기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

우리가 성불했다 하면 달라지는 것 아무것도 없다. 딱 하나 번뇌로부터 벗어날 뿐. 내가 하는 일 하나라도 신선하고 즐겁게.

지옥과 천당을 한 번 보자. 지옥의 공양 시간인데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음. 지옥은 본래 쇳물이 넘치고 굶주림이 극심한 곳인데 먹으려고 나눠 준 숟가락을 보니 너무 길어 먹을 수가 없다. 제 입에 못 넣음. 그 산해진미 한 톨을 못 먹음. 굶주림 상태 극심한 괴로움.

천당의 공양시간이다. 역시 천당답게 산해진미가 쌓여있다. 숟가락 길이 보니 더 길다. 그런데 숟가락 젓가락 펴서 앞사람 입에 넣어주더라. 제 입이 아닌.

지장경에 나오는 천당과 지옥보다 이것이 더 정확하다. 천당이란 마음에 달려있음. 천당,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마음 따라 일어남. 배고파 극도의 괴로움이 지옥이고 적당히 배 채우고 이곳이 재미있다하면 이곳이 천당이다.

절대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다.

우리의 용감하신 지장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관음보살들은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신다. 이분들은 자비심의 화현. 그 자비심에 의해 고정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만들어낸 지옥에 들어가면 전부 극락으로 바뀜. 당당히 걸어 들어가면 확 변해버림. 지옥 중생 구제 위해 걸어 들어가는 수행자 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걸 느끼고 바라봐서 사라지는 걸 보면 지옥하나 무너뜨리는 것이다. 고통스런 분노, 슬픔, 타는 듯 한 갈등 등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고 마음 집중하고 100% 사라지면 그것이 생겨나기 이전 여러분의 마음 한 번 본 것이다.

생각, 감정 등 이유 없이 올라오지 않는다.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 그냥 재미있는 한 편의 영화이다. 슬픈 영화 보면 울고 못된 짓 보면 화가 남. 그 원인은 내 속에 있음. 내 속에 그런 생각, 감정 없다면 일으키지 않음. 과거의 경험, 기억이 현재 의식 차원의 느낌, 기억 없어도 원인이 그런 환경에서 드러나는 것. 이 때 이 마음 바라보면 사라짐.

그런 생각과 감정 원인은 여러 인연 얽혀 생김. 생각 하나에 수많은 인연 얽혀 그 순간 소멸시킴, 해탈. 내 속 원인 종자에 환경이 만나 여지없이 일어남. 일어난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행동해버림. 그러지 않아도 수많은 업연에 또 하나의 연관 업 또 만들어 저장. 혜민스님 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밖으로 매달리던 나의 관심을 멈추어 되돌아보면 내 마음 볼 수 있다.

생각에 속으면 안 된다. 생각에 속아 이렇게 옴. 생각이 있는 줄 몰라서 속는가? 괴롭고 싶어 괴로운 사람 없다. 불행 속 눈물 흘리고 싶은 분,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해하며 짜증나는 분 없음. 누구나 행복을 추구. 그럼에도 괴로운 감정 더 많이 느끼고 삶. 자기 생각에 속는 하나 이유이다. 생각 있는 줄 알면 안 속음.

중국 고봉스님 선어록에 도둑놈이 우리 집에 들어 온 걸 알았다면 도둑 잡지는 못해도 도둑맞지는 않는다. 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속지 않음. 여기다가 수행력 갖고 가면 도둑놈도 잡게 됨. 생각이나 감정을 도둑에 비유.

1950년대 까지 생존한 중국의 마지막 선사 허운스님. 120세까지 삶. 조주스님 후신으로 여겨짐. *주: "염불하는 이놈은 누구인가" 참선 화두법 허운(虛雲, ****~****)선사는 중국 호남성에서 12세에 출가하여 120세까지 교화하시다 열반한 대선지식.

후학들 참선 지도 시 “객진(客塵)” 사용. 객은 여관 상상해 보시라. 매일 밤 들어와서 자고 가는 분들은 나그네. 객. 손님은 가게 되어 있음. 모텔 주인이 하루 있다 가는 일 없음. 주인은 떠날 수 없음. 객은 생각과 감정, 주인은 마음이다.

진은 티끌 진. 해가 뉘엿 질 때 창호지 문틈으로 한줄기 빛 비출 때 먼지 보이는 것. 그 티끌은 어디에서 날아다니는가? 이 공가에서. 비춰주니 보임.

허공 또는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 티끌은 왔다 갔다 함. 티끌이 생각과 느낌. 이 공간 안에서 움직임.

어떤 환경에 따라 맞는 생각과 느낌 안 일어나면 죽은 것이다. 일어나지만 상황이 바뀌면 그 전 생각은 계속 있을 수 없음. 객처럼 들락날락. 티끌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은 객진. 그것이 자기인 줄 아니 주인을 못 삶.

들어오지 말라 해도 들어 옴. 가는 것 잡는다고 안 가냐? 왔으면 가게 되어 있음. 집착하면 주인이 나그네 짓. 허공이 티끌 짓을 하게 됨. 그 짓 하려니 번뇌로 들끓게 됨. 번뇌의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냥 방치하면 결과는 고통이다. 원래의 위치, 포지션 잡아야.

나는 생각이 아니요 생각을 바라보는 자이다. 생각과 감정은 상황에 따라 생멸. 즐거움, 불쾌함 환경에 막히면 감정 또한 그렇다. 그 감정이 내가 아니요 바라보는 자가 나이다. 그러니 제행무상(諸行無常). 계속 변함.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을 잡아서 이것은 ‘이것이다’ 그럴 수 있는 순간 없음. 계속 진행 중. 허상. 참된 것 없음.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 이것을 나라고 착가하는 삶 때문에 우리 삶 공허. 이 감정, 티끌은 전체 중 하나.

이 안, 허공, 공간, 여기에 초점 맞추어야. 본래 나는 허공 자체. 그런데 미쳐서 티끌 하나 이것을 ‘나’라고 생각. ‘나’ 외에는 전부 ‘남’. 내 인생이 참될 수 없고 중생의 삶 물거품과 같다.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슬, 햇빛 비치면 사라짐. 번개도 마찬가지. 아무리 귀중하고 고상한 생각이라도 상관 없이 조건이 바뀌면 사라짐.

우리 삶도 똑 같음. 그런 예를 나라고 착각. 저 끝없는 하늘이 나. 떠다니는 구름을 나라고 생각함. 서산대사 입적송 왈,

  생야일편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부운자체본무실 (浮雲自體本無實)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생사거래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내 마음에 뭔 생각이 일어나는지 안 볼 때 일어남. 진짜 쳐다보면 하나도 안 움직임. 본래 나는 허공과 같다. 그게 나 인줄 모르고 구름이 나라고 생각. 이 구름 입장에서 보면 이러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허공이 없다면 구름이 생겨날 수 없다. 허공은 언제 생겨나는가? 이 허공은 언제 무너질까? 구름이 생겨나고 흩어지는 것은 볼 수 있으나, 허공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무너지지도 않는다. 건물은 무너뜨릴 수 있으나 허공은 안 됨. 불생불멸이기 때문.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마음에서 몸, 생각, 감정 생겨났기 때문에 때가 되면 무너짐. 무한대 허공이 곧 마음. 그 드넓은 허공이 우주를, 지구를, 이 몸을 만들어 냄. 마음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 깨달으면 저 허공이 내 마음.

허공은 지금의 허공과 100년 전 허공이 다른 것인가? 시간 개념 없음. 생각 일으키긴 했지만 순수 본래면목은 시간 개념 없고 따라서 공간 개념도 없음. 편의상 만들어 냄. 저 까마득한 우주도 마음이 만들어 냄. 깨달은 자의 마음은 텅 빈 허공, 통찰하기 때문에 한조각 구름이 나라고 집착 안 함. 무아. 탁 트임. 편견 갖지 않음. 둘로 나누지 않음. 나와 남이 사라짐. 나 잘되자고 남 해코지 안 함. 옆 사람 박살내는 게 나를 해친다는 걸 안다.

선. 본래 움직이지 않음. 바닷물에 파도에 의해 일 듯 생각과 감정 움직임. 그것을 잡고 들어 감.

1. 수식관

2. 염불- 이근원통 *주: 무심으로 부른 관세음보살 속으로 임심으로 내가 쏙 들어가 버리 는 방법, 소리를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 수행법.

3. 간화선- 화두

다음 12월 둘러 앉아 직접 내 마음 들여다보기. 지금은 별 신경 안 써서 잘 못 느낌. 진짜 내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 마음이 어떻게 하지 않으면 죽음. 기독교에도 불교 가르침 녹아 있다. 유독 크리스트교 잘 못 느낌. 성경에 떨어진 낙엽 하나라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이 진리이고 섭리이고 신. 허공은 무중력의 섭리. 통째 보면 다르지 않음. 불교는 창조론을 인정하지 않음. 그게 들어있기 때문.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다 마음이 만듦. 그러나 마음에다 신이라는 관 안 씌움. 부처성품을 아는 것, 성불.

제 말 소리 귀로 듣는 것 아님. 다른 생각 하고 있을 때는 전혀 안 들림. 관심, 집중할 때 들림. 듣고 있는 그 놈?= 마음. 부처의 성품. 이 마음 집에다 놓고 오나? 그렇게 할 수 없음.

포대화상이 산타클로스의 모델. 나는 밤마다 여래를 안고 잔다. 여래와 함께 깬다. 여래와 함께 공양한다. 몸은 사라지지만 사라질 수 없는 것이 마음. 뭘 어디서 헤매는가? 이 몸속에 있는데 뭘 해달라고 빌어야 하나? 그냥 꽉 차 있는 이것, 어디에 대고 절해야 할까? 불경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부처가 돌덩어리에 절하는 것 비유.

중국의 천연선사(丹霞 天然禪師) 추운 겨울밤 주지스님 장작 없다고 불을 때지 못하자 퍽퍽 소리 남.부엌에 가니 단하스님 법당 목불 업어다가 도끼로 쪼개 불을 때고 땀을 뻘뻘 흘림. 난리 난 대중들 성토에 부처님 다비식해서 사리를 얻으려 했다 함. 대중들이 목불인데 다비식하면 사리가 나오겠냐고? 사리도 안 나오는 부처는 부처도 아니지 그냥 나무토막이지.

부처님은 연기법의 진리를 전해 준 스승으로 대접. 스님께 이삿날, 시험 이런 것 묻지 말라. 불전함에 천원, 만원 넣는 것 스님 용돈 드리는 것. 불자라면 스님이 돈 없어 아르바이트 하러 다니는 것 바라지 않을 것.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똑같이 깨달아 알아듣는 언어로 그 가르침을 전하는 것. 복 원한다면 교회나 무당이 빠름.

불법승 삼보귀의 부처님 진리의 당체, 법-부처님 진리, 승-우리에게 공부 알려주시는 분들. 보배답게 자리매김 해야. 스님께 돈 줄 필요 없다 그러면 우리의 스승이 굶어 죽는 것. 제자가 스승을 죽이는 것. 오업죄에 해당.

참선하면 생각 일으키기 이전 텅 빈 고요, 밝고 맑게 깨어 있음. 번뇌 붙을 자리 없음. 매일 매일이 충만. 12월 올 때까지 내 마음이 부처를 외라. 그 때 직접 들여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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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선사의 일대기, 서산대사의 해탈시 등 재미있습니다. 간곡하게 나고 죽음 없고 시작과 끝도 없는 우리 마음을 일깨우는데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선행화님의 댓글

선행화 작성일

항상 애써주시는 길상화 도반님!
감사합니다. _()_

또 읽고, 또 읽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