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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대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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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상화 작성일12-12-06 00:17 조회2,7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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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카페에 올렸던 글인데 오늘 어쩌다 눈에 띕니다.

도로 미끄러우니 안전 운행들 기원드립니다_()_

 

 

 

우리의 삶이란 복잡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최소한 수십 년을 살아 왔어도 늘 헤매는 문제는 또 헤매지만 그러나 요즈음은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단순한 거구나 하고 편한 시선으로 반추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갑니다.

수십 년 전 함께 정진하셨던 한 선배 도반님이 얼마 전 한국에 오셔서 오랜 만에 연락이 닿아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불교철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그 방면의 해박함과 날카로움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셨던 분이셨다는 강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께서 고통스러운 암 치료를 병행하시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의 시각이 바뀌셨다고 하는데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수행이 그 전처럼 세세하고 번잡하고 빳빳이 풀 먹인 삼베 옷 같이 경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 그냥 별거 아닌 것이라는 인식이 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마저도 놓여진 무심한 상태를 너무나 편하게 생각하시는 그 여유가 마음 깊이 인상에 남겨졌습니다.

말씀뿐만 아니라 그 소탈함에서 오는 자연스런 부드러움까지, 그만큼 두어 번의 강산이 변했고 생사가 걸린 투병 생활을 해내셨고 지금도 진행 중 이신데도 불구하고 흐르는 기운은 조용한 개울물 한 줄기 흘러가듯 하는 편안함이었습니다. 다시 출국하시면서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는 말씀도 역시 오십 평생 수행한답시고 살아 봐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니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씀을 지극한 정성으로 당부하시니 속으로는 ‘이 삶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며 너무나 당연하신 말씀이라 여기며 가끔 다시 떠올려 보는데 그 의미가 시간이 지날수록 체념의 말씀이 아닌 인생사 대수용의 말씀으로 들려 가슴을 때립니다.

너무 애쓰지 말라- 쉬운 말로 바꾸면 ‘용쓰는’ 것입니다. 용쓴다는 것은 한꺼번에 기운을 몰아 쓰거나 힘들여 괴로움을 억지로 참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구현해 나감에 있어 한 고비 한고비를 만나고 넘기는 과정 중에는 무수한 용을 써야 가능한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태아도 좁은 산도를 죽을 고비 넘기면서 따라 나와야 했을 것이고 산모 또한 최소 몇 시간에서 수십 시간의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성인이 될 때 까지 또는 성인이 되어서도 내외적인 성장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한 가정과 한 직장을 일구어 한 분야의 일가(一家)를 세우는 일도 성공보다는 오히려 넘어지고 깨지고 피 흘리는 실수와 실패의 만만치 않은 국면들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원래 내재되어 있는 -타고난- 초월적 의지로 이러한 유한한 생명과 삶의 덧없음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고, 그 만큼의 노력의 댓가로 삶의 뽀송한 맨 얼굴을 대하듯 밝고 쾌적한 평화로움과 안락함을 누리기도 합니다.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 이상 사방팔방 어느 곳으로도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러할 때 용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경험들이 많습니다. 내가 우선 그 거센 기류(고난)를 견뎌낼 만큼의 인내심과 체력이 없고 그 기류의 본 성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니 최소한의 대응을 위한 정보도 없는데서 오는 불안으로 이중 삼중고를 겪습니다.

사실은 이럴 때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많은 대응책을 알고 있어야 할 필요도 -설사 알고 있더라도 제대로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일이 그 두통거리들에 반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릴 때 지리산 계곡들에서 모여 흐르는 고향 덕천강은 그 폭이나 길이가 상당했습니다. 폭우 뒤의 거친 물살과 그 강물의 양은 거대했지만 우리는 몸 하나로 두려움을 삼켜가며 수백 미터씩을 떠내려가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가다가다 보면 물살이 사라진 평화로운 넓은 수영장 같은 잔잔한 지점에 안착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무모한 불장난들이었으나 그런 긴장감 후의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그 두려움을 무릅쓰면서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개헤엄뿐인데 순간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한 생각 때문에 그것으로 그 물결을 거슬러 벗어나고자 했다면 이미 죽어도 여러 번 죽은 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 거센 강물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어떠한 한 생각 없이 그 흐름에 맡긴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내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이라는 두려움과 나를 잃고 싶지 않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인생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하여, 무게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무수한 용을 쓰게 됩니다.

내 앞의 고충과 어려움과 막다른 절벽에 맞닥뜨려 가만히 침묵의 의미에 겸허히 머리 숙일 때, 에너지 0%의 의식으로 흘러가야 할 일이 흘러가고 있는 것뿐임을 인정하며 함께 머무를 때, 진정 긍정적인 변화는 스스로 일어나고 주변의 기운이 알아서 해결의 문을 열어주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 없이, 말입니다.

그냥 내려놓기가 처음에는 수월하지만은 않겠지만 그 방법 외에 피안에 이를 가장 빠른 길은 없습니다. 체념과 포기가 아닌 연기(緣起)의 수순임을 거듭 사유해 갈 때 저 거센 물결은 고요해지고 이미 나는 저 평화로운 물 자체와 한 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불편한 정서가 올라오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정서를 표출하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보기를 제안드립니다. 곧 사라질 포말일 뿐이다라고 ‘관심끄기’(?) 관법으로 수 없는 연습이 되어진다면 드디어 그 정서에 몸을 맡겨 신나게 떠내려 가볼 때가 된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평안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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