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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죽비

초심자를 위한 警覺(경각)의 말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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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2-08 10:27 조회2,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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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위한


警覺(경각)의 말씀


박산 무이 선사


 


 


1. 發心(발심)을 堅固(견고)히 하라


 


공부를 지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나고 죽음을 부셔버리려는 마음을 堅固(견고)하게 일으켜야 한다.


세계와 身心(신심)이 모두 인연이 모여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일 뿐, 실다운 主體(주체)가 없다는 점을 看破(간파)했다 해도, 본래로 具足(구족)한 큰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나고 죽는 마음이 부셔지지 않고, 나고 죽는 마음이 이미 부셔지지 않았다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따라 다니는 無常(무상)이란 殺鬼(살귀)를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나고 죽음을 부셔버리겠다는 이 한 생각을 門()을 두드리는 기와로 삼아 마치 猛烈(맹렬)한 火焰(화염)속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한다.


한 걸음이라도 함부로 내디딜 수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며, 한 생각도 딴 생각을 낼 수 없고, 딴 사람이 구해주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만 모름지기 猛火(맹화)도 돌아보지 않고, 목숨도 돌아보지 않으며, 남이 구해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딴 생각도 내지 말고, 잠깐이라도 멈춰 있지 말고, 곧장 앞으로 냅다 달려서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것이 좋은 手()니라.


 


 


2. 疑情(의정)을 일으켜라


 


공부를 지을 때, 중요한 점은 疑情(의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을 疑情(의정)이라 하는가? 예를 들어, 이 삶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마땅히 온 곳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生死(생사)라는 關門(관문)을 부수지 못했으면, 疑情(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이를 눈썹에다 묶어 놓아라. 그리하여 내려놓으려 해도 내려놓을 수 없고,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다가, 忽然(홀연)히 어느 날 아침 의심 덩어리를 쳐부수면, 生死(생사)란 이 무슨 버려진 家具(가구)인가.


!  古德(고덕)이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치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치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치지 못한다." 하셨느니라.


 


 


3.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라


 


공부를 지을 때는,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血肉(혈육)으로 된 몸과 마음을 죽어버린 것과 같이하고서, 다만 이 일을 究明(구명)하고자 하는 이 한 생각만을 두어야 한다. 그러면 이 때의 한 생각은 마치 하늘에 기대는 긴 칼과 같아서, 그 칼끝에 닿는 것을 끝내 얻을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막힌 것을 씻어내고 둔한 것을 갈다 보면 칼도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다.


 


 


4. 고요한 경계를 즐기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무엇보다도 고요한 경계를 즐기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러한 경계는 사람을 말라 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히게 해서 知覺(지각)이 없게 한다. 사람들은 어지러운 경계를 싫어하고 조용한 경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싫어하지 않는데, 진실로 修行人(수행인)이 한결같이 시끄러운 곳에만 있다가 한 번 고요한 경계와 相應(상응)하면, 맛있는 엿이나 꿀을 먹듯이 耽溺(탐닉)하게 되는데,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어찌 알리오?


外道(외도)는 身心(신심)을 끊어 없애버리므로 죽어서는 頑石(완석:완고할 완)이 되는데, 이 또한 고요한 경계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진실로 세월이 흐르면 마르고 또 마르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여, 결국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떨어지니, 木石(목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혹 고요한 경계에 處()하더라도 다만 반드시 이 몸에 갖추어진 한 가지 큰 일을 밝히고자 할 뿐, 자신이 고요한 경계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야 하리라.


이 큰 일 속에서는 그 같은 고요한 모양을 구하려 해도 끝내 얻을 수 없나니, 이를 고요한 경계를 얻은 것으로 삼는다. 


 


 


5. 人情을 가까이 하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반드시 마음을 치우침이 없게 하고 곧고 굳센 意志(의지)로써 人情(인정)을 가까이 하지 말라. 만약 情()을 따라 應對(응대)하다 보면 工夫(공부)를 해도 진척이 없게 된다. 또한 진척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날이 가면 틀림없이 속인들이 하듯이 스승에게 아첨까지 하게 된다.


 


 


6. 疑團(의단)을 부셔라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며, 길을 걸으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르며, () 사람 萬()사람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하며, 온 몸과 안팎이 다만 하나의 의심 덩어리뿐이어서, '온통 뒤섞인 세계' 라 할만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 의심덩어리를 부수지 못했으면 맹세코 쉬어서는 안되니, 이것이 공부의 緊要(긴요)한 점이다.


어떤 것을 '온통 뒤섞인 세계' 라 하는가? 無量劫(무량겁) 이전부터 본래로 具足(구족)한 큰 이치는, 고요하고 조용하여 일찍이 움직인 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奮發(분발)하는데 있으니, 하늘이 돌고 땅이 돌면 저절로 波濤(파도)가 뒤집히고 물결이 솟아 오르는 한 가지를 受用(수용)하게 된다.


 


 


7. 죽기를 겁내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할까 겁내지 말고, 다만 살아만 있고 죽지 못함을 두려워하라. 참으로 疑情(의정)과 이를 묶어 한 곳에 두었다면, 움직이는 경계는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妄心(망심)도 깨끗이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끗해진다. 그리하여 六根(육근)이 자연히 텅 비고 豁達(활달)해진다. 이런 경계에서는 가리키면 곧 도달하고 부르면 곧 응답하니, 어찌 살아나지 못할까 근심하리오?


 


 


8. 맹세코 쉬지 말라


 


공부가 진척이 있으려면, 마치 어깨에 千斤(천근)이나 되는 무거운 짐이 있어 짐을 내려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는 형편이 되어야 하며, 잃어버린 중요한 물건을 찾을 때, 찾지 못했으면 맹세코 마음을 쉬지 않듯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만 執心(집심 : 잡을 집)을 내지 말고, 着心(착심 : 붙을 착)을 내지 말고, 計心(계심 : , 셈할 계)을 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잡으면 病()을 이루고, 무엇에 붙으면 魔()을 이루고, 생각으로 헤아리면 外道(외도)를 이룬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공부할 수 있다면, 이러한 세 가지 병패는 얼음 녹듯 녹아 사라지리니, 이른바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法體(법체)와 어긋난다' 는 것이다.


 


 


9. 반드시 憤志(분지)로써 惺惺(성성)하게 의심하라


 


화두에 의심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또렷또렷하고 분명하다가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해야 한다. 古人의 이른바 "고양이의 목을 베지 않으면 맹세코 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昏沉(혼침)이란 어두침침한 귀신 소굴에 앉아서 一生(일생)을 보내게 되니, 평생을 참선한들 무슨 得()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는 모양을 보라.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는 바짝 버티고 서서 다만 쥐가 잡힐 때를 기다렸다가 입에 들어가면 비로소 그만두지 그 전에는 설사 닭이나 개가 옆에 있어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만 憤志(분지:결낼 분)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밝히고자 할 뿐, 설사 8가지 경계의 바람(八風: 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방, 행복과 고통)이 눈 앞에 어지러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해도 돌아볼 겨를이 없어야 하나니, 만약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있다면, 쥐뿐만 아니라 고양이마저도 쫓아버리게 된다.


 


 


10. 실답게 공부하라


 


공부는 하루를 했으면 반드시 하루 한만큼 진척이 있게 해야지, 그렇지 않고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는 시늉이나 한다면, 百劫千生(백겁천생)을 해 봤자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향 한 개비를 꽂아놓고 향이 다 탄 것을 보고 문득 말하기를, "공부는 전과 비교해서 나아진 것도 없고 퇴보한 것도 없는데 하루에 태운 향이 얼마며, 1년에 태운 향은 얼마이던가? 세월은 쉽게 쉽게 지나가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아직까지 大事(대사)를 밝히지 못했으니 어느 날에나 마칠까?" 하고는 이 일로 해서 대단히 안타깝게 여기고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었다.


 


 


11. 公案(공안)을 망령되이 해석하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古人(고인)의 公案(공안)에 대해 추측으로 판단하여 망령되이 解釋(해석)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해서 설사 낱낱이 公案(공안)을 이해하면서 지나간다 하더라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古人(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갈래야 갈 수 없고 만져볼래야 만져볼 수조차 없으며 더구나 그 속에 앉거나 눕는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사이에 大小(대소)를 나누고 上下(상하)를 論()한다면 身命(신명)을 喪失(상실)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12. 이 일은 敎()와는 다르다


 


이 일은 經()의 가르침과는 合()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오래도록 大乘(대승)의 業()을 닦아온 사람도 알지 못하거늘, 어찌 聲聞(성문)이나 緣覺(연각)과 같은 小乘(소승)들이 알 수 있겠는가? 三賢(삼현)•十聖(십성)이 어찌 經()의 가르침을 通達(통달)하지 못했을까 마는 이 일을 말하면 三乘(삼승)()이 떨리고 十地(십지)보살도 깜짝 놀란다.


等覺(등각)보살은 說法(설법)을 구름이 온 하늘을 가득 덮듯, 비가 온 세상을 다 적시듯 하면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며 無生法忍(무생법인)에 들어갔음에도 오히려 '所知愚(소지우)'로 인해 '()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 이라고 하니, 그 밖의 중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개 이 일은 簿地凡夫(부지범부: 장부 부)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바탕이 같지만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바다. 믿는 이는 이 공부를 감당할 그릇이 되고 믿지 못하는 자는 그릇이 못 된다. 이 宗乘(종승)에 들어가고자 하는 수행자들은 모두 믿음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에는 얕은 것과 깊은 것이 있고 바른 것과 삿된 것이 있으니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얕다'는 것은, 무릇 法()의 門()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法門(법문)을 믿지 않을까마는, 단지 법문만 믿고 자기의 마음은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깊다'는 것은, 모든 大乘(대승)의 보살들도 오히려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니, 華嚴疎(화엄소)에 이르기를, "법을 설하는 자가 있고 법을 듣는 대중이 있다고 보면, 여전히 아직 믿음의 문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라고 했다. 예를 들어 '마음 그대로가 부처' 라는 말을 누군들 믿지 않을까마는, '네가 부처냐?' 하고 물으면 이 믿음은 밀려나고 인정하지 못한다.


[法華經(법화경)]에 이르기를, "모든 생각을 다해 헤아릴지라도 佛智(불지)는 헤아리지 못한다." 라고 했는데, 어째서 생각을 다해 헤아려 보려는 마음이 있는가? 대개 믿음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삿된 믿음'이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면 바른 믿음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法()을 취하면 삿된 믿음이라 한다. 반드시 깊이 (참구)하여 자기의 마음을 밝혀서, 몸소 실제로 '그대로가 부처'인 경지를 밟아 보아 의심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이라 한다. 그렇지 않고 흐린 눈에 얼굴만 큰 덜 떨어진 놈이 간단한 것도 의심하듯 단지 '마음이 부처'라고 말만 할 뿐, 실지로는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삿된 믿음이라 한다.


 


 


13. ()에서의 定()의 의미


 


古人(고인)은 복숭아를 따면서도 定()을 익혔고, 호미로 밭을 매면서도 定()을 익혔으며, 갖가지 所任(소임)을 보면서도 定()을 익혔으니, 어찌 오래도록 앉아 마음을 막고 내리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한 뒤에야 그것을 定()이라 여겼겠는가? 이 같은 것은 삿된 定()이지 禪()에서의 바른 의미는 아니다.


六祖(육조)가 이르시기를, "부처님은 항상 定()에 들어 계셔서, ()에 들어 있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시니, 모름지기 본체를 撤見(철견) 해야만 이러한 定()과 상응할 수 있다.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고, 皇宮(황궁)에 내려오시며, 雪山(설산)에 들어가고, 明星(명성)을 보고, ()과 같은 중생들을 깨우치신, 이 모든 것이 이 定()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움직이는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러고서야 어찌 定()이라 할 수 있으리오.


움직이는 경계 속에서도 그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을 구하려 해도 할 수 없고, 고요한 경계 속에서도 또한 고요함이 일어나는 곳을 구하려 해도 할 수 없다. ()과 靜()이 이미 일어나는 곳이 없다면, 무엇으로 경계를 삼을까? 이 뜻을 알면 완전히 하나뿐인 定體(정체)가 꽉 차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딴 것이 있을 수 없으리라.


 


 


14. 世間法(세간법)에 물들지 말라


 


공부를 지을 때는, 世間法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佛法(불법) 중의 일이라 할지라도 한 點()만큼도 물들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세간의 法()이겠는가?


만약 眞正(진정)으로 話頭(화두)가 現前(현전)하면 얼음을 밟아도 차가운 줄 모르며, 불을 밟아도 뜨거운 줄 모르며, 가시나무 숲을 몸을 옆으로 해서 곧장 지나가더라도 걸리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世間法속에서 마음대로 부딪쳐도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모두 경계에 굴리어 나자빠지게 되니, 공부가 한 덩어리가 되기를 바라더라도, 그럴 날은 나귀해[,허년]가 되어도 꿈에서조차 만나지 못할 것이다.


 


 


15. 글에서 찾지 말라


 


工夫人(공부인)은 글에서 찾아 말귀를 쫓거나 말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공부에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를 가져와서, 眞實(진실)한 공부를 도리어 반연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 마음 갈 곳이 없어지길 바란들, 어찌 될 수 있겠는가?


 


 


16. 比量(비량: 견줄 비, 헤아릴 양)을 조심하라


 


공부를 지을 때는 무엇보다 比量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저런 마음을 모아 들여 따져보게 되면 道()와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는 미륵이 下生(하생)할 때까지 계속 해 봤자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만약 疑情(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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