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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죽비

성철스님 小參法門 3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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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조 작성일13-12-28 09:38 조회2,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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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체(一切)를 버려라


 


一念心淸淨하니       


한 생각 마음이 깨끗하니,


處處에 蓮花開더라.   


곳곳에 연꽃이 피더라.


一花一淨土요.         


꽃 하나에 정토 하나씩이요.


一土一如來라.         


극락세계 한 곳에 아미타불이 한 분씩 계시더라.


 


이 게송은 중국의 유마거사(居士)라고 불리는 방거사의 게송인데,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꽃이 핀다.’ 이 말이 아니고, 마음이 깨끗하니, 본래 꽃이 피어 있는, 본래 극락세계, 본래 아미타불을 보게 되더라 이 말이야.


 


온 시방세계가 정토(淨土)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중생이 번뇌망상에 마음의 눈이 가리워서 그것을 못 볼 뿐이다 그 말이여. 온 시방세계 어느 곳이든지 극락세계 아님이 없고, 아마타불이 안 계신 곳이 없어. 항상 무진법문(無盡法門)을 하시고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하고 계시거든.


 


그렇지만 중생은 그것을 못 본다 그 말이여. 그 못 보는 이유는 번뇌망상에 가리워서 못 볼 뿐이지, 본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정토(淨土)...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 불교에서 많이 비유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란 거울과 같은데, 거울이 본래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거기에 때가 묻고 먼지가 꽉 끼면 아무 것도 안 비친다 이 말이여. 그렇지만 그 물건이란, 모든 삼라만상이란 엄연히 그대로 존재하고 안 있어?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야.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 정토인데,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거울에 때가 끼어서 못 보는 것과 같다 이 말이여. 그래 공부를 많이 해서 번뇌망상을 쉬어 버리면, 거울의 때가 다 없어져 버린단 말이여. 그러면 거울이 환하게 안 드러나겠어? 본 마음이 드러난다 이 말이여. 본 마음이, 본 거울이 드러나면, 그때 가선 모든 것이 다 비치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 가지고 번뇌망상을 다 쉬어 버리면 자기 마음의 눈을 떠 버린다 이 말이여. 눈을 뜨면 온 시방세계가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고 아마타불 안 계신 곳이 없다 이 말이여.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목표며 근본 원리야.


 


요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나, 극락세계를 볼 수가 있나 이것인데, 꼭 참으로 마음의 눈을 떠서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임을 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공부해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구하는 생각이나 집착이 있으면 마음거울의 때가 닦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고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금방 말한 게송의 임자가 방거산데, 방거사 자체부터가 그렇거든. 천하갑부야. 발심(發心)을 해서,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아서 좋은 금은보화와 보석, 보물로 바꿨어. 바꾸니 큰 배로 두 배여. 그래서 배에 싣고서 동정호() 한 가운데 가서 한 배를 물에 집어넣었단 말이여. 뱃사공들이 가만히 보니 저 사람이 미쳤거든. 그걸 팔아서 딴 데 가서 돈으로 바꿔서 재산을 사려는 줄 알았는데, 물 한복판에 집어넣거든.


그래서 “아니, 그 아까운 보물을 물속에 집어넣을 필요가 뭐 있소? 남은 보물을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을 텐데, 왜 그러시요?” 하고 물으니


“허허, 내가 나쁘다고 내 버린 물건을 어떻게 남을 줄 수가 있소?” 하는 거라


안 그렇겠어? 자기가 나쁜, 못 쓰는 물건이라고 내버린 물건을 어찌 남을 줄 수가 있나 그 말이야.


 


이 물질이라는 것은 사람의 욕심의 근본이 되어서 자꾸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리고, 결국 업()을 두텁게 해서 참으로 진리를, 부처님을 못 보게 한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재물이 중생들에게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비상(독약)보다도 더 무서운 거라 이 말이여. 비상인 줄 알고서 내가 안 먹으려 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죽으라고 줄 수가 있냐 이 말이야!


그래 남은 배도 마저 집어넣어 버렸어. 천하 갑부가 알거지가 되어 버렸어. 두 손 뿐이야. 기록에도 ‘다만 조각배 하나 타고 다닐만 했다’. ,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버려 버렸어.


그런 큰 결심, 천하갑부라는 그런 큰 재산을 팔아서 아무 미련 없이 완전히 내버릴 수 있는 그런 큰 결심이 있으면,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어. 만약 그런 큰 결심이 없으면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딴 생각하는 사람이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야. 부처님은 왕궁도 내버렸는데 그까짓 재물 좀 버린 것쯤은 천하 쉬운 것 같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야.


 


그래 누구든지 참으로 大道를 성취해서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 극락세계, 이대로 해탈, 이대로 부처임을 보려면 먼저 모든 것- 마음속에 있는 것이든 마음 밖에 있는 것이든-을 다 버려야 돼. 그러면 벌거벗은 몸뚱이뿐 아니야? 이렇게 돼야만 大道를 성취할 수 있거든.


그러면 방거사는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았느냐.


저 산 있는데 가서 토굴 하나 짓고서 마누라와 아들, 딸과 함께 산죽(山竹)으로 조리를 만들어서 어린 딸한테 시켜 팔아서 쌀로 바꿔서 그렇게 먹고 살았어.


누가 보면 미친 사람 아니야? 그 많던 재산 다 버리고 저- ... - 얄굿은 데 가서 산죽을 쪄서 조리를 만들어서 어린 딸한테 시켜서 팔게 해서 양식으로 바꾸어 먹으니 미친 사람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게 철저한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대도를 성취할 수 있겠어?


그럼 나중에 끝이 어떻게 됐냐 하면, 석두스님, 마조스님을 찾아가서 대도를 완전히 성취했으니, 조사스님들과 똑 같은 이야.


나중에 갈 때도 아주 자유자재하게 갔어. 그때 식구들은 밖에 다 나가고 딸만 있었는데, 방거사가 “내가 해가 중천에 뜨는 12시쯤 되면 갈테니까 때가 되면 기별해라” 했더니 한참 있다가 “아버지 밖에 나와 보십시오, 이상한 게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래?” 하고 밖에 나와 보니 아무것도 없거든. 다시 방에 들어와 보니 딸이 합장(合掌)하고 서서 가버렸어. 그대로 죽어 버렸단 말이여.


그러자 방거사가 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 딸이 기봉(機鋒)이 참으로 빠르다” 칭찬해 줬거든.


그 뒤에 화장해 놓고 일주일 뒤에 영제를 지냈는데, 그 당시 자사(刺史, 주지사)가 그 소문을 듣고 오자 자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법문을 해 주고는 가 버렸어.


그때 아들은 마침 밭을 매고 있었는데, 자사가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가 지금 막 돌아 가셨네” 하니, “아, 그래?” 하면서 밭을 매고 있던 호미를 탁 꽂으면서 벌떡 일어서 버리거든. 그런데 안 움직여. 가보니 또 가버렸어.


그런 대자유가 있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비록 재산은 전부 다 물에 집어넣어 버리고 홀홀 단신, 알거지가 되어 조리를 만들어 쌀로 바꿔 먹기를 평생 했으니, 물질적으로 보면 하나도 가진 게 없는 거지지만, 道로 봐서는 천하에 이 보다 더 큰 부자는 없었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영가스님 말씀도 그 말씀 아니냐?


 


궁석자왈청빈(窮釋子口稱貧)이나 보시신빈도불빈(寶是身貧道不貧)이라,


모든 것을 다 버렸으니까 입으로는 가난하다 해도, 몸은 가난해도 도는 천하 부자다 이 말이야.


우리가 출가한 중이 되었던지, 發心한 보살이 되었다면, 몸은 가난해도 道는 부자가 되어야지. 道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가 되면, 이건 佛法하고 반대여. 그렇지만 요새 보면 반대로 나가거든, 道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다 이거야.


이 공부를 성취하려면 첫째 해탈이 있나 없나 이게 문젠데. 해탈이 왜 없어!


몇 해 전에도 법관 세 사람이 판사를 여남은 명 데리고 와서 물을 게 있다고 그래.


그래, 그래 뭐냐니까, 확실히 불교에 해탈이 있냐 이거라.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해탈이 없을 것 같으면 불교가 2천년 3천년 이대로 내려 올 턱이 있냐고. 그래 설명을 좀 해 줬더니 잘 알겠다더구만.


아까 방거사 일화에서처럼 분명히 자유자재한 대해탈 경계가 있다 이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모든 것을 내버리고 공부를 해야 되지. 마음속으로든지, 마음 밖으로든지 온갖 것을 다, 살림살이를 잔뜩 재워놓고 공부를 하면 자꾸 거울에 먼지가 더 앉는다 이 말이라. 때가 더 묻어서 더 깜깜해 버려. 깜깜해 갖고 꽃은 무슨 꽃이, 극락세계는 무슨 극락세계가, 아미타불은 무슨 아미타불이 비치냐 말야. 하나도 안 비친단 말이라.


참으로 한 생각 마음이 청정(淸淨)해서 온 처처(處處)에 연꽃이 피고, 온 處處가 극락세계고, 온 處處에 아마타불이 꽉-차 있는 것을 보려면 - 본래 꽉 차있어, 못 볼 뿐이지 - 마음을 닦아야 되는데, 마음을 닦으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된다 이건데, 버리려면 방거사처럼 물질적인 것이든지 정신적인 것이든지 다 버려야지, 이건 쪼끔 놔두고 저건 쪼끔 놔두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미래겁이 다하도록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 말이여.


 


 


2) 견성(見性)의 올바른 이해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전엔 내가 흔히 말할 때, 선방에 와서 두 철 세 철도 안지나서 견성했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일본에는 어떤 풍조가 있냐면, 일본사람들이 미국 가서 참선 가르친다고 선방을 많이 짓고 이러는데, 미국 가서 어떻게 가르치냐면, 견성해 갖고 참선을 해. 그게 되긴 돼?


‘오모리’ 라고 화원대학 학장인데, 임제종 사람이야. 그 사람이 미국 가보니 자기가 봐도 기가 막히거든? 보니 ‘견성단’ 이라고 해서 견성한 사람은 그 쪽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견성을 하지 않은 사람은 패를 나눠서 참선을 시키거든. 그래 견성단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데.


“당신이 견성을 했다는데 무얼 아느냐?” 하니,


“나는 無! 하는 것 밖에 모른다” 이거라.


話頭를 無자를 주거든. 이래 가지고 화두를 배워서 無! 할 줄 알면, 見性했다고 인가(印可)를 해버려. 너는 견성했으니까 참선(參禪)을 해라 이거라. 세상이 자꾸 이렇게 변하는 판이야. 그 내용이 “대법륜(大法輪)” 이라고 일본에서 나오는 불교전문잡지 안있어? 거기 9월혼가, 10월호에 나와 있어. 미국에 가면 전부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거든. “無! 할 줄 알면, 니 견성했다” 이러고 참선을 가르친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불교가 자꾸 거꾸로 나가는 판이야.


그래서 하도 보다 못해서 이전 스님네의 법문이나 이런 것들을 뽑고 해서 “선문정로(禪門正路)” 를 지었는데, 내 말이 아니고 예전 조사스님네의 말, 부처님의 말을 기준으로 해서 견성의 내용이 어떻다는 것을 조금 말했어. 생전에 출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옆에서 들어 아는 사람이 자꾸 꼭 생전에 출판해야 된다고 말해서 올해 출판했는데, 그걸 보면 견성이란 게 어떻다는 걸 대강 알 수 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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