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품바' 배우 정규수 (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배우 정규수는 10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전성기가 '지금'이었으면 좋겠다"며 "오늘의 진심을 쌓다 보면 언젠가 오겠죠."라고 말했다. 2025. 9. 10. seva@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얼마나 많이 했느냐보다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숫자는 부질없더군요."
연극 120편, 드라마 90편, 영화 70편…. 한때 스스로 세어보다가 그만뒀다는 배우 정규수(68)는 10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정규수의 '품바'는 1981년 고향인 전남 무안 인의예술회에서 시작해 1993년까지 전국을 돌았다. 서울 등기권리증 서대문의 '말뚝이 소극장' 앞에는 관객 대기 줄이 일상이었다. 방송 '뉴스 파노라마'에 소개된 각설이들의 마을 '천사촌'을 찾아가 녹취를 따 오고, 고(故) 김시라와 함께 대본을 빚었다.
"막걸리를 대접하며 노래를 받아 적었죠. 김시라 선생이 북(고수)을 치고, 저는 배우로 섰습니다. 약 1천500회 무대에 올랐습니다. 울음이 안 나오면 농협전세대출금리 꼬집어서라도 울던 무지렁이였어요. 그만큼 무식하게, 그러나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각설이 쇼'가 밤업소를 누빌 만큼 유행하던 시절, 1대·2대·3대 '품바'라는 호칭도 생겼다. "누가 진짜 1대냐고요? 잘하는 사람이 1대죠." 그에겐 수치보다 현장이 남았다. 부산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정규수'라 자칭하던 각설이와 마주한 해프닝, 미국 인정이자분개 클리블랜드 공연에서 즉석에서 '타령'을 시킨 관객이 훗날 주한 미국 대사(레이니) 지명자였다는 일화까지. "거지가 대사님을 들었다 놨다 했죠. '노 프로블럼'이라며 웃던 그 표정이 잊히질 않습니다."



'2019 SBS 연기대상' (서울=연합뉴스) 2019년 12월 31일 서 대학교 기숙사 울 마포구 SBS 프리즘타워에서 열린 '2019 SBS 연기대상' 레드카펫에서 배우 정규수(왼쪽부터), 병헌, 노행하, 안길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던 1980년대 초, 그는 시민군 사이로 흘러들었다.
"화순에서 신용보증기금 이전 넘어온 총을 나눠주던 때였어요. 골목에서 한 아주머니가 '애기 경기 들어 죽는다, 제발 쏘지 말라'고 소리치는데, 그 말에 도저히 방아쇠를 못 당기겠더군요. 총은 곧장 YWCA에 반납했습니다."
이후 광주 시인들의 권유로 서울 무대에 올랐고, '한'(恨)을 품은 노래와 이야기로 객석을 채웠다.
정규수는 정점에서 방향을 틀었다.
"혼자만 하는 모노드라마의 습관이 생겼어요. 주고받는 호흡이 잘 안됐죠. 그래서 10년 가까이 마을 사람 1, 군중 3으로 무시당해도 버텼어요."
그의 변곡점엔 동료와 가족의 냉정한 피드백이 있었다. 대극장 작품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은 날, 아내는 "오늘 관객 티켓값은 당신이 물어야 해. 설렁설렁했다"는 일침을 남겼다. 그는 "그날 이후 무대에서 '업' 된 자만을 경계하게 됐다"고 했다.
연출가들을 스스로 찾아다녔고, 개런티 없이도 무대에 올랐다. 그는 "깐깐한 분들 밑에서 배우는 게 행복이었다"고 회고했다. "강준혁 선생은 '부(富)와 게으름을 멀리하라. 건방지지 말라'고 하셨고, 구히서(본명 구희서) 선생은 매 회차 호흡과 톤을 짚어주셨죠." 그가 세 차례 받은 '히서연극상'은 실력과 인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영월 지국장 역은 작은 장면이 현장에서 커진 경우다. "A·B·C 안을 준비해 감독에게 제안했죠. '형이 알아서 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책임을 늘려갔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창원 '팽나무 마을'의 이장으로 등장해, 실제 그 마을의 명예 이장이 됐다.
그가 가장 아끼는 무대는 시인 천상병을 그린 '소풍'이다.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절로 흘러나왔어요. 시의 호흡을 몸으로 통과시키는 시간이었죠." '문제적 인간 연산', '홀스또메르'가 스펙터클과 미학을 보여줬다면, '소풍'은 삶의 온도를 새겼다.



연극 '동 주앙' 제작보고회 (서울=연합뉴스) 2011년 2월 16일 서울시 중구 명동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 '동 주앙'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배우 김도현, 정규수, 이율(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2000년대 초반,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시작한 '하얀 수건 상'은 올해 18회를 맞았다. "밭일하다가 아이의 땀을 닦아주던 '엄마의 하얀 수건'에서 이름을 빌렸습니다. 인성·성실·상냥함을 기준으로 대학로의 버팀목이 된 배우를 기립니다."
팬 후원으로 운영하며 상패·하얀 수건·뒤풀이까지 챙겼다. "제가 없어도 이어지도록 제도화할 방식을 찾고 있어요. '네가 뭔데 상을 만드느냐'는 말도 들었지만, 이제는 '이번엔 누구에게 주라'며 응원해 주십니다."
그는 여전히 연필로 적고 지우개로 지운다. "40년을 들고 다닌 필통이 제 역사입니다." 대본은 두 권. 하나에는 그날의 일기·사회 이슈·농담·멜로디까지 거침없이 적고, 다른 하나에는 연기 노트를 추려 옮긴다. 공연이 끝나면 연기 노트만 남았다. 그는 "시대와 같이 흐른 '일기 대본'을 버린 게 두고두고 아쉽다"고 했다.
유년의 가난은 식습관을 바꿨다. "용돈이 없어 친구들이 사준 빵을 되갚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컸어요. 그래서 빵·과자·커피·단 것·튀긴 것 모두 제겐 '독약'이 됐습니다. 지금도 못 먹어요. 대신 맥주는 잘 마십니다. 하하."



정규수 품바 CD 재킷 [본인 제공]


정규수는 요즘 '1인극 붐'을 흐뭇하게 보면서도 경고한다. "모노드라마는 달콤합니다. 그러나 자아도취의 함정이 있어요. 먼저 앙상블에서 오래 버텨 '주고받기'를 몸에 새기세요." 연습실에선 가장 어린 스태프에게 먼저 묻는다. "사심 없는 관객의 눈이 제일 정확합니다. 오른쪽으로 잔을 들까, 왼쪽으로 들까… 사소한 질문에서 길을 찾습니다."
하고 싶은 배역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 주제에 뭘 가리겠습니까. 넥타이 맨 '무게 있는' 인물보다 시장 상인·농부·노동자 같은 서민의 얼굴이 더 잘 맞아요."
마지막 소망은 간명하다. "연기하면서 살다가, 연기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전성기가 '지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진심을 쌓다 보면 언젠가 오겠죠."
그는 인터뷰 말미에 후배들에게 남기는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하고 또 하고 또 해라. 많이 보고·많이 듣고·많이 말하라. 후회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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