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다운로드 ⊙ 프라그마틱 슬롯 무료 ⊙
페이지 정보
작성자 뇌강지운 작성일25-10-17 09:08 조회1회 댓글0건본문
손오공릴게임예시 ⊙ 알라딘게임공략법 ⊙● 77.rzc216.top ∫━
‘21세기 섬 택리지’ 15권 완간…여수로 낙향한 ‘이섬 선생’ 이재언
‘21세기 섬 택리지’를 완성한 이재언 광운대 해양섬정보연구소 연구원이 전남 여수 돌산도를 배경으로 섬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워매, 억수로 개안하네.”
지난 1일수익창출
전남 여수시 자봉도. 정영애(92) 할머니의 머리가 ‘엄청 개운하게’ 다듬어졌다. 은퇴한 미용사 김숙자(66)씨의 가위질이 정 할머니의 말에 흥이 더해져 춤추는 듯했다. “이섬 선생, 나 이뻐?” 정 할머니의 말에 ‘이섬 선생’이라 불린 남자가 가을 햇살처럼 웃음을 퍼뜨렸다.
이 섬, 자봉도는 전국 3390여 개의 섬 중 하나. 대한민IT종목
국 유인도 446곳을 모두 탐사해 책으로 남기고, 섬 주민들이 먼 육지에 가야 접할 수 있는 서비스업을 직접 서비스해 온 사람. 이재언(73) 광운대 해양섬정보연구소 연구원이다. 탐사는 35년째, 봉사 활동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펀드상품
‘이섬 선생’ 이재언씨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김포시에서 여수로 집을 옮겼다. 이런 ‘광대역 이사’는 그의 삶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번이 네 번째 4위너스클럽
00㎞ 이사였다. 밤바다 여행으로 유명한 여수 앞바다에서 그를 만났다.
Q : 섬 주민들이 ‘이섬’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먼저 궁금하네요. A : “저는 섬에 미친 놈입니다. 그 섬, 저 섬, 이 섬에 가고 또 갔죠. 제 성(姓)을 써서 ‘이섬’이란 필명을 만들었습니다. 섬사람들도 좋아해요.” 1960년대 상경해 중앙신세계인터내셔날 주식
일보 ‘배달소년’
Q : 김포에서 여수까지 멀리 이사했습니다. A : “여수에서 부릅디다. 그만 내려오라고요. 이런 먼 이사가 처음도 아니고요. 여수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궁금했다. ‘여수에서 부른다’ ‘여수는 제2의 고향이다’라는 문장들의 속사정을. 그런데 이섬 선생은 아내 얘기를 먼저 꺼냈다. “제가 속을 많이 썩였죠. 그래서 아내가 급히 떠난 것 같아요.”
Q : 걱정거리를 많이 주셨습니까. A : “제가 1991년부터 섬 탐사를 해왔습니다. 전국의 모든 유인도를 세 번 이상씩 찾았어요. 어떤 곳은 열 번도 찾았죠. 주민 이름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내는 노심초사, 제가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무식할 정도로 제가 용감하거든요. 실제로 사고도 잦았어요. 아내는 심장이 약해졌고요.” 그는 안개가 제일 무섭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보일 때 공포가 해일처럼 덮친다면서다. 2011년 전남 신안군의 안개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상황, 구조하러 온 해경도 이씨의 배 ‘등대호’를 못 찾아 세 번이나 출동했단다. 2015년엔 목포의 갯벌에 걸려 배가 침몰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벌금이 컸다. 수백만원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러니 아내가 걱정 안 하겠어요.” 아내는 2년 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2% 모자라요.” 그의 눈가가 흐려졌다.
Q : 김포에서 여수로 온 이유는 뭔가요. A : “여수는 섬의 고장입니다.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해 365개의 섬이 있어요. 섬 복지 활동을 할 최적의 장소입니다. 근거지가 되죠. 섬사람들을 위해 제가 힘을 더 내려고 왔습니다. 또 1년 뒤인 내년 9월부터 여수에서 세계섬박람회가 열리는데 제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수에서 부른다’고 한 겁니다.” 여수세계섬박람회는 섬을 주제로 한 국내 첫 박람회로 정부가 승인한 국제행사다. 여수시는 2012년 엑스포 이후 14년 만에 국제 박람회를 치르게 된다. 일본·프랑스·그리스 등 30국 300만 명의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섬 복지 활동은 2005년 시작했다. 이발·미용과 안마, 밑반찬 해주기 등 뭍에서는 소소하지만 섬에선 큰일인 여럿을 해결해 준다. 전남 신안·진도와 충남 보령에서도 벤치마킹했을 정도다. 다음 달엔 20주년 행사도 연다.
Q : 제1의 고향은 어딥니까. A : “전남 완도군 노화도에서 태어났어요. 섬 촌놈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랑 목포에 나갔는데, 우와~. 기차·마차·자동차, 큰 건물과 음식. 보리밥과 고구마가 일상이던 제겐 충격이었어요. 노화도가, 섬이 싫어졌어요. 가출했습니다. 14살 때였어요. 서울로 무작정 향했죠. 하지만 할 게 없었습니다. 구두를 닦는 것밖에는요. 중부경찰서 옆 수양다방 부근이었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중부경찰서 주국진 경사와 이영자 순경이 공부하라며 중부직업소년학교에 보내줬어요. 구두닦이에서 신문팔이로 ‘승격’했습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어요. 배달원을 위해 마련해준 ‘청운회’라는 곳에서 숙식했죠. 1968년 중앙일보 1면에 난 소련의 체코 침공 사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후 강원도 태백 황지광업소에서 채탄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Q : 섬이 싫어서 떠났다가 섬이 좋아서 돌아온 거네요. A : “좋아진 건 돌아온 다음입니다(웃음). 제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습니다. 마흔이 넘어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패스했고 대학원까지 다녔습니다. 그나마 제가 엇나가지 않고 살아온 큰 이유는 종교인 것 같아요. 신문을 팔면서 기독교를 접했어요. 이후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1989년 섬 선교사로 파송돼 서울에서 노화도로 다시 내려갔죠. 아내는 반대했어요. 어렵사리 터전을 잡은 서울에서 400㎞ 가까이 떨어진 곳에 누가 내려가고 싶겠습니까. 아들 둘은 서럽다며 펑펑 울었어요.” 14세 때 가출이 첫 번째, 37세 때 선교사 파송이 두 번째. ‘광대역 이사’의 초기 약력이었다.
Q : 노화도가 가출 이전과 달라졌습니까. A : “여전했습니다. 1990년 2t짜리 ‘등대 1호’가 태어났어요. 제가 이 배의 선장 겸 항해사가 돼 노화도 주변 섬을 돌며 선교와 봉사 활동을 했죠. 그런데 호기심이 생겼어요. 섬을 계속 들여다보니 당시 관련 책이나 논문이 거의 전무했어요. 연구자도 없었습니다. 호기심이 사명감으로 바뀌더라고요. 아,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 가난하고 불편한 섬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자. 다음엔 제2의 고향 여수에 파송됐어요. 1993년입니다. 고흥과 보성 등 찾는 섬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어요. 당시엔 GPS(위성항법장치)도 없었고 항해도만 보고 다녔어요.” 이섬 선생은 여수 백야도의 백야교회에서 목사로 부임했다. 서울공동모금회 후원이 이뤄졌고, 5t으로 커진 배는 GPS를 달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잘 다녔다. 목포대에서 부른 것도 이때다. 목사직을 사임하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이 됐다. 그는 “여수에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섬 진짜 아름다움은 사람 있어야 완성” 그는 후원과 GPS 등 ‘날개’를 달고 전국 446개의 모든 유인도를 찾아 기록했다. 노화도에 다시 내려간 지 25년 뒤인 2015년 드디어 『한국의 섬』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다. 2년 뒤엔 13권짜리로 완간했다. 446개 섬의 역사와 문화·인문·사회·지리는 물론 특산물·여행지·교통편까지 망라했다. 조선 시대 『택리지』 이후 최초의 전국 섬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21세기 섬 택리지’로 불리기도 한다.
휴대폰이 없던 1990년대, 섬 탐방을 위해 주민들과 통화하다 보니 한 달 전화비가 20만원이 나오기도 했다. 바다 이동 거리를 물어보니 “글쎄, 재보지는 않았는데 ‘해저 2만리’가 있듯 해양 2만리, 즉 8000㎞는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몰래 앓고 있었다. “2023년 아내가 세상을 뜨고 김포로 올라갔어요. 광운대 연구원 자리를 얻었죠.” 이섬 선생의 세 번째 장거리 이사였다.
Q : 『한국의 섬』에 더해 『북한의 섬』을 낸 게 이즈음이군요. A : “네. 사실 북한에는 갈 수 없어서 국회도서관과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등에서 방대한 자료를 모았어요. 마치 현장에 간 듯 집필했습니다.”
Q : 섬 탐사 중 뿌듯한 일도 많았겠어요.
A : “섬에 가면 어쩔 땐 주민들이 돈봉투를 줍니다. 문제가 되는 그런 봉투 아니고요. 복지 활동에 보태라고 기부하는 거예요. 5만원, 10만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다시 돌려드려요. 충남 태안군 외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규정상 20가구는 돼야 작은 발전소를 지어주는데 19가구가 살았거든요. 한 가구만 전입시키라고 태안군청에 탄원서를 냈어요. 군청에서 오케이했죠. 2년 뒤 외도 발전소 기공식에 제가 초청받았어요. 15년 전인가 여수 월호도 윤근조 이장이 베트남 출신 마이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결혼상담소와 갈등이 생겼을 땐 제가 중재에 나섰어요. 안 그랬으면 월호도 우편물은 다른 사람이 배달했겠죠(웃음).”
이재언 연구원(오른쪽)이 전남 여수시 백야도에서 윤근조·마이나 집배원 부부에게 본인 저서인 『한국의 섬』을 선물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마침 저기 있네요.” 윤씨 부부가 백야도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월호도에 살면서 인근 제도·자봉도까지 세 개 섬의 우편집배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섬 선생이 “남편이랑 어렵게 결혼하게 된 것 알아요?”라고 묻자 마이나가 “왜 그런 걸 말 안 했어”라며 남편 어깨를 툭 쳤다. 윤씨는 “뭘 그런 걸 말해. 그냥 그랬던 거지”라며 허허 웃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이섬 선생의 얼굴이 다시 가을 햇살처럼 환해졌다. “섬에는요, 사람이 있어요. 섬의 아름다움보다 사람이 섬의 미래입니다. 이런 사람 냄새가 제 책에 담긴 거죠. 앞으로도 이들과 오래 동고동락할 겁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1세기 섬 택리지’ 15권 완간…여수로 낙향한 ‘이섬 선생’ 이재언
‘21세기 섬 택리지’를 완성한 이재언 광운대 해양섬정보연구소 연구원이 전남 여수 돌산도를 배경으로 섬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워매, 억수로 개안하네.”
지난 1일수익창출
전남 여수시 자봉도. 정영애(92) 할머니의 머리가 ‘엄청 개운하게’ 다듬어졌다. 은퇴한 미용사 김숙자(66)씨의 가위질이 정 할머니의 말에 흥이 더해져 춤추는 듯했다. “이섬 선생, 나 이뻐?” 정 할머니의 말에 ‘이섬 선생’이라 불린 남자가 가을 햇살처럼 웃음을 퍼뜨렸다.
이 섬, 자봉도는 전국 3390여 개의 섬 중 하나. 대한민IT종목
국 유인도 446곳을 모두 탐사해 책으로 남기고, 섬 주민들이 먼 육지에 가야 접할 수 있는 서비스업을 직접 서비스해 온 사람. 이재언(73) 광운대 해양섬정보연구소 연구원이다. 탐사는 35년째, 봉사 활동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펀드상품
‘이섬 선생’ 이재언씨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김포시에서 여수로 집을 옮겼다. 이런 ‘광대역 이사’는 그의 삶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이번이 네 번째 4위너스클럽
00㎞ 이사였다. 밤바다 여행으로 유명한 여수 앞바다에서 그를 만났다.
Q : 섬 주민들이 ‘이섬’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먼저 궁금하네요. A : “저는 섬에 미친 놈입니다. 그 섬, 저 섬, 이 섬에 가고 또 갔죠. 제 성(姓)을 써서 ‘이섬’이란 필명을 만들었습니다. 섬사람들도 좋아해요.” 1960년대 상경해 중앙신세계인터내셔날 주식
일보 ‘배달소년’
Q : 김포에서 여수까지 멀리 이사했습니다. A : “여수에서 부릅디다. 그만 내려오라고요. 이런 먼 이사가 처음도 아니고요. 여수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궁금했다. ‘여수에서 부른다’ ‘여수는 제2의 고향이다’라는 문장들의 속사정을. 그런데 이섬 선생은 아내 얘기를 먼저 꺼냈다. “제가 속을 많이 썩였죠. 그래서 아내가 급히 떠난 것 같아요.”
Q : 걱정거리를 많이 주셨습니까. A : “제가 1991년부터 섬 탐사를 해왔습니다. 전국의 모든 유인도를 세 번 이상씩 찾았어요. 어떤 곳은 열 번도 찾았죠. 주민 이름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내는 노심초사, 제가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무식할 정도로 제가 용감하거든요. 실제로 사고도 잦았어요. 아내는 심장이 약해졌고요.” 그는 안개가 제일 무섭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보일 때 공포가 해일처럼 덮친다면서다. 2011년 전남 신안군의 안개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상황, 구조하러 온 해경도 이씨의 배 ‘등대호’를 못 찾아 세 번이나 출동했단다. 2015년엔 목포의 갯벌에 걸려 배가 침몰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벌금이 컸다. 수백만원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러니 아내가 걱정 안 하겠어요.” 아내는 2년 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2% 모자라요.” 그의 눈가가 흐려졌다.
Q : 김포에서 여수로 온 이유는 뭔가요. A : “여수는 섬의 고장입니다.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해 365개의 섬이 있어요. 섬 복지 활동을 할 최적의 장소입니다. 근거지가 되죠. 섬사람들을 위해 제가 힘을 더 내려고 왔습니다. 또 1년 뒤인 내년 9월부터 여수에서 세계섬박람회가 열리는데 제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수에서 부른다’고 한 겁니다.” 여수세계섬박람회는 섬을 주제로 한 국내 첫 박람회로 정부가 승인한 국제행사다. 여수시는 2012년 엑스포 이후 14년 만에 국제 박람회를 치르게 된다. 일본·프랑스·그리스 등 30국 300만 명의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섬 복지 활동은 2005년 시작했다. 이발·미용과 안마, 밑반찬 해주기 등 뭍에서는 소소하지만 섬에선 큰일인 여럿을 해결해 준다. 전남 신안·진도와 충남 보령에서도 벤치마킹했을 정도다. 다음 달엔 20주년 행사도 연다.
Q : 제1의 고향은 어딥니까. A : “전남 완도군 노화도에서 태어났어요. 섬 촌놈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랑 목포에 나갔는데, 우와~. 기차·마차·자동차, 큰 건물과 음식. 보리밥과 고구마가 일상이던 제겐 충격이었어요. 노화도가, 섬이 싫어졌어요. 가출했습니다. 14살 때였어요. 서울로 무작정 향했죠. 하지만 할 게 없었습니다. 구두를 닦는 것밖에는요. 중부경찰서 옆 수양다방 부근이었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중부경찰서 주국진 경사와 이영자 순경이 공부하라며 중부직업소년학교에 보내줬어요. 구두닦이에서 신문팔이로 ‘승격’했습니다. 중앙일보를 배달했어요. 배달원을 위해 마련해준 ‘청운회’라는 곳에서 숙식했죠. 1968년 중앙일보 1면에 난 소련의 체코 침공 사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후 강원도 태백 황지광업소에서 채탄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Q : 섬이 싫어서 떠났다가 섬이 좋아서 돌아온 거네요. A : “좋아진 건 돌아온 다음입니다(웃음). 제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습니다. 마흔이 넘어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패스했고 대학원까지 다녔습니다. 그나마 제가 엇나가지 않고 살아온 큰 이유는 종교인 것 같아요. 신문을 팔면서 기독교를 접했어요. 이후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1989년 섬 선교사로 파송돼 서울에서 노화도로 다시 내려갔죠. 아내는 반대했어요. 어렵사리 터전을 잡은 서울에서 400㎞ 가까이 떨어진 곳에 누가 내려가고 싶겠습니까. 아들 둘은 서럽다며 펑펑 울었어요.” 14세 때 가출이 첫 번째, 37세 때 선교사 파송이 두 번째. ‘광대역 이사’의 초기 약력이었다.
Q : 노화도가 가출 이전과 달라졌습니까. A : “여전했습니다. 1990년 2t짜리 ‘등대 1호’가 태어났어요. 제가 이 배의 선장 겸 항해사가 돼 노화도 주변 섬을 돌며 선교와 봉사 활동을 했죠. 그런데 호기심이 생겼어요. 섬을 계속 들여다보니 당시 관련 책이나 논문이 거의 전무했어요. 연구자도 없었습니다. 호기심이 사명감으로 바뀌더라고요. 아,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 가난하고 불편한 섬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자. 다음엔 제2의 고향 여수에 파송됐어요. 1993년입니다. 고흥과 보성 등 찾는 섬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어요. 당시엔 GPS(위성항법장치)도 없었고 항해도만 보고 다녔어요.” 이섬 선생은 여수 백야도의 백야교회에서 목사로 부임했다. 서울공동모금회 후원이 이뤄졌고, 5t으로 커진 배는 GPS를 달았으며, 아이들은 학교를 잘 다녔다. 목포대에서 부른 것도 이때다. 목사직을 사임하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이 됐다. 그는 “여수에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섬 진짜 아름다움은 사람 있어야 완성” 그는 후원과 GPS 등 ‘날개’를 달고 전국 446개의 모든 유인도를 찾아 기록했다. 노화도에 다시 내려간 지 25년 뒤인 2015년 드디어 『한국의 섬』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다. 2년 뒤엔 13권짜리로 완간했다. 446개 섬의 역사와 문화·인문·사회·지리는 물론 특산물·여행지·교통편까지 망라했다. 조선 시대 『택리지』 이후 최초의 전국 섬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21세기 섬 택리지’로 불리기도 한다.
휴대폰이 없던 1990년대, 섬 탐방을 위해 주민들과 통화하다 보니 한 달 전화비가 20만원이 나오기도 했다. 바다 이동 거리를 물어보니 “글쎄, 재보지는 않았는데 ‘해저 2만리’가 있듯 해양 2만리, 즉 8000㎞는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몰래 앓고 있었다. “2023년 아내가 세상을 뜨고 김포로 올라갔어요. 광운대 연구원 자리를 얻었죠.” 이섬 선생의 세 번째 장거리 이사였다.
Q : 『한국의 섬』에 더해 『북한의 섬』을 낸 게 이즈음이군요. A : “네. 사실 북한에는 갈 수 없어서 국회도서관과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등에서 방대한 자료를 모았어요. 마치 현장에 간 듯 집필했습니다.”
Q : 섬 탐사 중 뿌듯한 일도 많았겠어요.
A : “섬에 가면 어쩔 땐 주민들이 돈봉투를 줍니다. 문제가 되는 그런 봉투 아니고요. 복지 활동에 보태라고 기부하는 거예요. 5만원, 10만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다시 돌려드려요. 충남 태안군 외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규정상 20가구는 돼야 작은 발전소를 지어주는데 19가구가 살았거든요. 한 가구만 전입시키라고 태안군청에 탄원서를 냈어요. 군청에서 오케이했죠. 2년 뒤 외도 발전소 기공식에 제가 초청받았어요. 15년 전인가 여수 월호도 윤근조 이장이 베트남 출신 마이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결혼상담소와 갈등이 생겼을 땐 제가 중재에 나섰어요. 안 그랬으면 월호도 우편물은 다른 사람이 배달했겠죠(웃음).”
이재언 연구원(오른쪽)이 전남 여수시 백야도에서 윤근조·마이나 집배원 부부에게 본인 저서인 『한국의 섬』을 선물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마침 저기 있네요.” 윤씨 부부가 백야도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월호도에 살면서 인근 제도·자봉도까지 세 개 섬의 우편집배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섬 선생이 “남편이랑 어렵게 결혼하게 된 것 알아요?”라고 묻자 마이나가 “왜 그런 걸 말 안 했어”라며 남편 어깨를 툭 쳤다. 윤씨는 “뭘 그런 걸 말해. 그냥 그랬던 거지”라며 허허 웃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이섬 선생의 얼굴이 다시 가을 햇살처럼 환해졌다. “섬에는요, 사람이 있어요. 섬의 아름다움보다 사람이 섬의 미래입니다. 이런 사람 냄새가 제 책에 담긴 거죠. 앞으로도 이들과 오래 동고동락할 겁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