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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백완승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자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 박강희는 민중불교운동연합 관련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버니가 운영하던 '논금호타이어주식
장서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  결혼 하고 두 아들을 낳아 기르던 시절의 백완승
일정일흑


ⓒ 민청련동지회




구차한 삶은 저리 가라

당시 각 대학 앞에는 운동과 관련이 있는 책을 주로 판매하는 이른바 '사회과학서점'이 한 군데씩 있었다. 서울대릴게임종류
앞의 광장과 그날이 오면, 연세대 앞의 오늘의 책, 성균관대 앞의 풀무질, 고려대 앞의 장백서원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논장서점은 대학 앞이 아니라 광화문 한복판에 있어서 대학생이면 누구나 아는 장소였다. 또한 시내에서의 약속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논장서점 주인 백완승을 괴롭히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압수수색이었다. 수사건설화학 주식
기관은 '불온서적'을 이유로 책을 압수해 갔지만, 서점 주인에게는 피 같은 돈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 있을 백완승이 아니었다.
백완승은 전국인문사회과학서적상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수사기관의 불법적인 압수수색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와 연대하여 동맹 휴업 및 침묵 시위를 주도했자화전자 주식
다. 이 일로 여러 차례 즉심에 넘겨져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다.
논장서점을 운영하던 1986년,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로부터 졸업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1983년 말, 정부에서 '제적생 복교 조치'를 발표했는데, 그는 독재정권이 내주는 사탕발림 같은 것은 받아먹지 않겠다며 복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졸업이라니.
학교로 돌아간 1979년에도, 1980년에도 등록만 해놓고 수업에 들어가질 않아서 학점이 모자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과 조교는 당시 교수들이 학점을 다 주었기 때문에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며, 졸업논문도 자기들이 알아서 해놓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대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백완승은 단박에 거절했다.
"야, 쪽팔리게 대필해 준 학사 논문으로는 졸업 못 하겠다. 내가 쓰겠다. 괜찮은 관련 논문이나 좀 모아놔라."

그러나 서점 운영하랴, 젖먹이 둘 키우랴, 논문 쓸 시간이 도통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 또한 '쿨'하게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과 교수가 책을 사러 왔다. "졸업은 했나"라고 물어보기에 논문을 제출하지 못했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과에 연락을 해보고 "자네, 이미 졸업 처리됐네"라고 알려주었다. 백완승은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그 졸업장 가져다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니고'라며 잊고 살았다.










▲  1981년 무렵, 고려대 여학생운동권의 대선배인 천영초와 함께 바닷가를 찾은 백완승


ⓒ 민청련동지회




거물 정치인 정세균과 맞짱 뜨다

백완승은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원칙을 벗어나는 구차한 삶을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백완승이 졸업장을 사용한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1994년, 고향인 전북 무주로 낙향하여 30여 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할 때였다. 당시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여성으로서 무주 군수에 도전했다. 학력란에 고려대 졸업이라고 적었더니, 이를 두고 학력 위조라는 흑색선전이 돌았다. 그래서 졸업장이 아닌 '졸업증명서'를 떼어 제출했다.
지방자치에 도전한 과정도 백완승다웠다. 30여 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제에, 서울도 아닌 보수적인 농촌에서 여성이 군수라는 자리에 도전하는 것은 당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 지구당 위원장인 정세균은 그에게 공천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백완승은 구차하게 공천을 구걸할 생각이 없었다. 기꺼이 김대중의 당과 결별하고 무소속 여성으로 군수에 도전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낙선이었다.
그러나 백완승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2000년에는 무주⋅진안⋅장수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자신에게 군수 공천을 주지 않았던 정세균과 맞붙었다. 역시나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백완승은 포기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쿨'하게 정치권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백완승은 서점을 정리하고 '도서출판 논장'을 새로 차려 아동 분야 출판에 전념했다. 당시 출판계는 아동 분야가 호황을 맞고 있었고, 백완승의 전환은 시의적절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돈을 벌고 생활이 안정되는 것에 만족할 백완승이 아니었다.

밥알단 활동가










▲  2015년 밥알단 활동을 하는 백완승


ⓒ 민청련동지회




2014년 무렵부터 백완승은 '밥통' 활동에 뛰어든다. 밥통은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이유로 싸우고 있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식사를 지원하기 위해 그해 3월에 만들어진 협동조합이었다.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이나 억울한 이들이 벌이는 농성장을 찾아서 따뜻한 밥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주 사업이었다.

밥통은 기아자동차 현장 노동자 하상수가 제안한 사업이었다. 그는 "돈 없고 빽 없어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 밥통을 시작했다. 저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버티는 것이다. 잘 먹어야 힘내서 끝까지 버틸 수 있다. 그래서 밥차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밥통에서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자원봉사단이 밥알단이다. 백완승은 이 밥알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편 박강희에 따르면, "어느 날 보면, 밤을 새워서 엄청난 양의 반찬을 만든다. 그리고 아침이면 그걸 싹 다 가지고 나가더라"라고 말했다.
사실 백완승이 밥알단에 참여하게 된 건 '아들' 때문이기도 했다. 아들이 민주노총 소속 건설노조에서 상근자로 일하면서 파업 현장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고생하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체 노동자들로 향했을 것이다.
"야, 놀자" 민청련 송년회 기획
대학생 시절부터 민속극과 탈춤에 매료됐던 백완승은 어쩌면 타고난 광대였는지도 모른다. 2014년 당시 민청련동지회 회장이었던 나는 그해 송년회를 조금 색다르게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백완승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백완승은 구태의연한 송년회 행사는 집어치우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뉴라이트가 국사 교과서 파동을 일으키는 등 정치 정세도 꿀꿀하고 하니, 이번에는 한번 왁자하게 놀아보자고 했다.
장소는 민족극 분야의 대선배인 박인배씨가 사장으로 있는 세종문화회관을 알아보자고 했다. 장소부터 통이 컸다. 기존의 민청련 송년회는 작은 식당을 예약해 조촐하게 식사하고 술 한잔 나누는 정도로 치러왔던 참이었다.
세종문화회관의 소규모 홀을 임대하고, 송년회 제목도 '민청련동지회 야자 송년회'로 이름 붙였다. 백완승이 왕년에 탈춤극 '궁정동 말뚝이'를 연출한 실력으로 송년회 진행을 기획했다.

송년회는 회원들의 악기 연주, 노래자랑 등으로 흥겨운 한마당 잔치판이 되었다. 물론 백완승은 걸한 목소리로 우리 소리를 멋지게 불러 좌중을 압도했다.










▲  ‘민청련동지회 야자 송년회’에서 회원들과 춤을 추는 백완승


ⓒ 민청련동지회




백완승은 어디에서나 '대장'이었고, 의리와 정의로 뭉친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남자다운' 여성이었기에 어떤 사람은 그를 페미니스트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의 백완승은 여성운동가는 아니었다.

백완승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남자들이 "너도 여자냐?"며 비아냥대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백완승은 "그러는 너는 남자냐?"고 되묻고 싶었다. '너도 여자냐'는 말 속에 담긴 마초적 맥락을 그대로 따른다면, 남자들은 모든 상황을 '남자답게' 씩씩하게 해결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백완승은 남자들에 대해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댓거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독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건 누구도 '○○답게'만은 살 수 없었던 그 시대 상황에서 자신마저 또 다른 상처를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백완승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 진짜 여자거든. 여성성이라는 게 어떻게 낭창낭창 하늘하늘한 섹시한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걸핏하면 징징대고,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쁜 척, 나약한 척, 그렇게 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유효기간 3년밖에 더 되겠냐. 오히려 어떤 시련이 몰려와도 제 자리를 지키며, 상처받고 나약한 생명을 품고 먹이고 돌보고 길러내는 모성성이 더 긴 유효기간을 갖는 진짜 여성성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모성성 속에서도 자신은 함량 미달은 아니었는지, 여성으로서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자문하며 고뇌하는 백완승이었다.










▲  1983년 신혼 무렵의 백완승


ⓒ 민청련동지회




아버지와의 따뜻했던 추억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백완승은 오히려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는 모든 갈등은 '누가 됐던 의무 감당보다 권리 주장이 가당치 않게 높은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는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백완승의 아버지를 포함해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무섭고 외롭게 자신의 짐을 짊어져 온 분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들 앞에서 내색조차 하지 않고, 눈물조차 씹어 삼키며 살아간 분들이었다.
백완승은 "그런 아버지들이 감당한 고난에 비례해 그 반의 반도 안 되는 약간의 권위를 부여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권리가 의무와 등가 교환되어야 한다면,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오히려 심하게 소외된 존재들이었다고 느꼈다.
백완승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일화가 있다. 1980년 5월 17일, 집에 형사들이 들이닥쳤고, 백완승은 베란다 창고에 숨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형사들이 집 앞에서 잠복 중이었기 때문에 탈출이 문제였다. 마침 그날은 아버지가 지인들과 봄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계모임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들였고, 다 같이 몰려 나갈 때 아줌마로 변장해 그 속에 섞여 탈출했다.
백완승은 그 길로 도망가지 않고 태연하게 계 모임 봄나들이에 따라갔다. 아버지는 딸에게 고기도 구워주고 술도 따라주었다. "당분간 편히 못 먹을 테니까 많이 먹어라"라고 하면서 잘 익은 고기는 죄다 딸 앞으로 몰아주었다. 백완승은 목이 메어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백완승은 다시 도피의 길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딸의 길을 막지 않았지만, 조언은 해주었다. 해방정국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경찰로 일하며 우익의 학살을 목격했던 아버지는 "공포에 질린 인간은 종종 옳고 그른 판단을 잃어버린다"며 딸에게 경고했다. 그는 "너희도 너무 극단적인 방법으로 싸우지 마라. 어느 쪽이든 시작이 되면 그 끝은 예측할 수 없다. 공포에 사로잡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너무 한쪽으로 몰아가지 마라"고 말했다.
백완승이 운동을 하면서 이념이나 이론에 기초해 판단하지 않고, 의리와 인정, 정의감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조언에서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에 무심했던 여장부
백완승은 남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무조건 베푸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인색하고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2019년 무렵부터 그는 부쩍 허리가 아파왔다. 척추 디스크인가 해서 정형외과를 찾아 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사실 백완승은 이전에 신장 결석으로 여러 번 치료를 받은 바 있었다. 그때 한쪽 신장이 여러 차례에 걸친 결석 치료 과정에서 많은 손상을 입었다. 의사는 신장 기능이 더 악화돼 치료 불가능한 상황이 오기 전에 신장 제거 수술을 권유했다. 그러나 백완승은 장기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몹시 거슬렸다. 그래서 그 의사 욕을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허리 통증은 척추 디스크 때문이 아니라 한쪽 신장에 자란 종양이 원인이었다. 자기 몸에 대해 무심했던 백완승은 아랫배에 참외만 한 덩어리가 만져지는데도, 그저 숙변으로 인한 변비일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종양이 점차 커져 암으로 변하고 나서도 그는 찜질과 마사지로 버텼다. 결국 암 판정을 받은 시점에서는 이미 온몸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백완승은 그렇게 반년 정도 투병 끝에 2020년 4월 3일,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백완승을 강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또한 편견이다. 생전에 그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떤 영화에선가 탱크가 막 밀려오는데도 달아나지 않으려고 자기 다리를 묶어 놓고 싸우는 아랍 전사를 본 적이 있어. 그 위로 탱크가 그냥 지나가고... 갑자기 내 꼬라지를 보는 것 같아서 숨이 턱 막혀 오더라고.

티 안 나게 관리해서 그렇지 나 사실은 무쟈게 겁 많은 애였거든. 엄마가 매만 들어도 아빠 등 뒤에 숨어서 매 내려놓을 때까지 못 나오고. 아빠가 화만 조금 나신 것 같아도 어쩔 줄 몰라 눈물부터 찔찔 짜는, 그래서 한 대도 못 패는 아이였지.

상상이 안 되지? 하지만 어떡하냐, 겁 많은 자라도 용기를 내야 했던 그런 시대였는걸. 매 순간 이게 내 한계지 싶은데도 그 이상을 해치워야만 했어.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았고, 이제 그만 주저앉거나 달아나고 싶기도 했지. 지극히 인간적인 내 안의 비겁과 싸우려면 용감한 척이라도 해야만 했던 시절을 살았어."


부디 저세상에서는 용감한 척할 필요 없고, 비겁을 숨길 필요도 없는 평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기를.










▲  백완승이 막바지 투병 중이던 2020년 1월, 고려대 민주동우회 신년식에서 동문들이 백완승의 쾌유를 빌며 “백대장 파이팅”, “궁정 말둑이 파이팅” 등이 적힌 패널을 들고 응원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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